산오름

삼성산 삼막사를 들러보다.

자어즐 2014. 4. 3. 21:05

 

 삼성산 삼막사 돌아보기

 

친구들이랑 전날 간단한 산맛을 본지라 태평한 마음인데 우리 김여사는 좀이 쑤시는 눈치다. 해서 아점을 먹고 떡과 과일 한 조각만 준

비하여 삼성산으로 향한다. 몇번을 찿았어도 삼막사는 먼발치에서 보고 지나치기만 해서 오늘은 어떻게 생겨먹은 것인지 가까이서 보고

사진으로 본 남녀근석도 구경 한번 해볼까 한다. 정오가 다되가는 시간에 관악역을 나와 도보로 안양예술공원 주차장 뒤에 있는 보장사

에 다다른다. 여기를 들머리로 하여 학우봉능선을 만나 삼성산 삼막사를 들렀다가 장군봉능선,석수능선으로 석수역에 갈 참이다

 

1. 누구가 : 집사람(김여사)이랑 두리서       

2. 언    제 : 2014년 03월 30일(일요일)  맑음. 

3. 어디로 :  삼성산 삼막사

4. 얼마나 : 5시간51(휴식.식사시간 포함)

 

▼ 이동경로 : 관악역-보장사-제1전망대-제2전망대-학우봉-삼막사-거북바위-불영암-석수역

 

 

 

 

▼ 관악역에서 1번 국도로 나와 건너편 삼성초등학교를 지나 안양유원지(안양예술공원)으로 들어선다.

 

▼12:14 안양예술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오다.

 

▼주차장 뒤쪽에 있는 석수동 마애종

  이 마애종은 달아놓은 종을 스님이 치고 있는 장면을 거대한 바위에 묘사한 것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마애종이다.
  사각형의 결구형식에 쇠사슬로 연결된 종은 음통을 갖춘 비교적 정교한 종뉴 아래에 약간 벌어진 형태의 종신이 연결되어 있다. 종신

  의 표면에는 상대와 붙어 있는 유곽, 종복에 있는 연화문 당좌, 뚜렷하지 못한 문양을 새긴 하대가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공간의

  균형감이 있어 보이며, 전체적으로도 안정감이 있는 종을 표현하였다. 이 마애종은 조각수법이나 종뉴·종신의 표현 등에서 신라말 내

  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마애종의 유일한 예로서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12:17 보장사 옆길을 들머리로 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 삼성산 산림욕장 안내도

 

 

 

▼12:53 제1 전망대

 

 

▼수리산과 안양시내

 

 

 

 

▼ 데크쉼터 제2전망대를 뒤에두고 어느 젊은 부부의 사진을 찍어 준 반대급부로 우리도 한장 한다.

 

 

▼ 12:58 삼성초교를 지나 학우봉 능선으로 오르면 만나는 삼거리.

 

 

▼ 바위들 사이에 작은 틈새에서도 뿌리가 내린다.

 

 

▼경인교육대학교 경기켐퍼스.

 

▼ 우리 같이 이르지 않는 시간에 오르는 이들이 상당하다. 앞 쪽의 정체로 어떤 이의 뒤태를 수월찮게 보게 된다.

 

▼ 하늘과 바위와 나의 그림

 

 

 

 

 

▼ 자전거팀들 대단한 열정이란 생각이 든다.

 

 

 ▼ 13:27 데크쉼터

 

▼ 당근 쉬운 길.

 

 

 

 

 

 

 

 

 

 

▼ 13:39 제2 전망대

 

▼ 오늘 두리서 좌에서 우로 갈 능선.

 

 

 

 

 

 

 

▼진달래 한송이가 외롭다.

 

 

▼ 학우봉 위를 가르는 비행기 한대 포착.

 

▼ 학우봉 표지목을 보고 김여사와 앞쪽에서 만나자고 하고 나는 학우봉을 오른다.

 

▼ 소나무 한그루 바위 사이로 이쁘게 서 있는 뒤쪽에서 넘어 온 길이다

 

 

▼ 13:57 학우봉 정상석 안아보다.

 

▼ 삼성산 정상 바로 아래에 삼막사가 드디어 보이기 시작하다.

 

▼ 관악산,삼성산 국기봉 11개 중에 삼성산 국기봉이 육안으로는 보이는데 사진에는 안 보인다. 

 

 ▼ 지나온 학우봉과 제2전망대.

 

▼ 예전 같으면 이런 표정은 엄두도 못냈는데 장족의 발전을 했다.

 

 

 

 ▼ 사진에도 국기봉의 국기가 보인다.

 

▼ 안내도에 매직으로 여러군데 보충해 놓았다

 

▼ 삼막고개 쉼터 사거리.국기봉과 염불암이 300m 거리에 있다.

 

 

▼ 가까워진 삼막사 전경 

 

 

▼ 돌을 깔아놓은 잘 꾸며놓은 길로 들어가서는 뒤쪽에 칠성각과 남녀근석이 있는 곳인 줄 모르고 삼막사로 내려가는 바람에 다시 이곳

   길로 왔다갔다하는 시간과 발품을 팔았다.

 

 ▼ 14:31 뒤쪽 언덕을 내려와서 삼막사로 들어오니 처음 만나는 삼귀자(三龜字). 거북 귀 세글자를 세겨 놓은 의미는 무엇일까...

 

조선후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池錫英)의 형 지운영(池雲英 1852 ~ 1935)이 이곳 백련암지(白蓮庵址)에 은거할 당시에 쓴 글로 바

   위면을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귀자를 새겨 놓았다.  삼귀자 좌측엔 「불기 2947년 경신중양 불제자 지운영 경서」란 명문이 있어 1920

   년에 쓴 것이며 서체는 전서(篆書)로 우측에는 「관음몽수장수영자」라 하여 꿈에 관음보살을 본 후에 글씨를 썼음을 알 수가 있다.

 

 

▼지운영-지석영의 형

  백련 지운영(白蓮 池雲英1852-1935)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던 서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사진가이기도 하고 정치가

  이기도 했던 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지설봉(雪峰)이란 이름을 사용하다가 유배 후 삼악사 위에 백련암을 짓고 기거하며 운영

 (雲英)으로 개명하고 미술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사진사(寫眞史)에서는 어진사진과 황실사진을 찍은 정도로만 기록이 되어있지만

  종두법 보급을 위해 힘쓴 지석영의 형으로, 고종과 사대당 정부의 밀명에 의해 진행된 김옥균, 박영효 등의 암살을 위해 일본에 특파될

  만큼 개혁적이고 활동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물론 실패한 후 체포되어 유배 생활 후 정치적 재기는 더 이상 실현할 수 없었던 만큼

  사회적 활동은 중단된다. 그 후 그의 행적은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만큼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 불교내의 기록에

  정진한 것처럼 보인다.

  절망감이 가득한 가운데 안거에 들어가 만든 삼귀자란 바위글씨도 잠재된 울분을 밖으로 표출하려던 당시 상황의 표현이지 않을까?

  거북 귀(龜)자를 상형문자, 주술적, 한문체로 다양하게 표현하여 보여주지만 처음 획에서부터 단절된 것이 없이 글을 쓴 것이며 많은

  뜻이 있는 의미의 축소판이 속으로 갈무리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의 행적은 가까이 있는 의성 고운사에 ‘백련거사 견원 지운영(白蓮居士 犬原 池雲英) 수월대선사의 비문을 찬하고 쓰다.’ 라는 행적비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 내에서의 입지나 활동범위를 추측할 수 있다.  [안동신문칼럼]

 

 

▼ 산신각

 

 

삼막사 사적비(三幕寺事蹟碑 경기 유형문화재 125호)

  이 비의 비갓은 팔작지붕형이고 지대석(地臺石)은 땅에 묻혀 있다. 비문(碑文)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나 "조선국경기

  (朝鮮國京圻) 관악(冠岳) 산맥갑묘행룡삼성산하 (山脈甲卯行龍三聖山下) 사명삼막좌유향로봉(寺名三幕左有香爐峰)"과 건립연대(建立

  年代)를 밝히는 "강희(腔熙) 46년(四六年) 정해(丁亥)"란 명문(名文)이 있어 이 비석(碑石)의 위치는 경기 관악 산맥 삼성산밑 삼막사에

  있고 왼쪽에는 향로봉이 있으며, 조선(朝鮮) 숙종(肅宗) 33년(1707)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주고있다.

 

 

 

삼막사 삼층석탑 (三幕寺 三層石塔.경기 유형문화재 112호) 

   삼막사 선실 뒤편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에

   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탑신의 몸돌에만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두툼한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다. 꼭대기에는 1979년에 보수한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주고,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에 맞선 삼적사 승려 김윤후가 싸움에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不二門.사랑은 물속의 蓮花처럼 다시 솟아 오른다. 

  사찰에 있는 여러 문 중에서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 바로 불이문(不二門)이다. 말 그대로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

  임을 의미한다. 이 문을 본당 입구에 세운 것은 이곳을 통과해야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으며,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역시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가 연결된 하나이다. 이렇게 불이(不二)를 알게

  되면 비로소 부처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불이는 분별도 떠났고, 언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절대의 경지를 상징하는데 『유마경』

  에는 불이법문(不二法門)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마가 보살들에게 “불이법문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니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 “모든 것을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고, 알려 해도 알 수 없으므로 모든 물음과 답변을 초월하는 것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제는 문수보살

  이 유마에게 불이법문을 물었다. 그러나 유마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보살은 그러한 유마를 칭찬하며 “문자와 말까지도 있지 아니

  한 것이 참으로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길”이라 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불은 열반에 들기 전 “나는 40여 년간 단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

  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불이와 통하는 맥락이다.

 

▼ 過去에 함께 산 因緣과 現在에 만난 幸福으로......

 

 

▼ 14:45 마애불상과,남녀근석이 어디있는지 찿아 보다 이제야 만난 이정목.가르키는 방향을 보니 시간 절약할 수 있었는데 몰라서 조

    금은 억울하다.

 

14:53 삼막사 남녀근석(三幕寺 男女根石.경기도 민속 문화제 제3호)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17년(677)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

   했다고 하며,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칠성각을 둔 것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우리 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다산과 출산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기원을 한다. 그 기원의 방법으로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크기는 남근석이 높이 1.5m,

   여근석이 높이 1.1m 정도다.

 

이것은 삼막사 칠성각 서북편에 있는 2개의 자연 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 부른

   다. 옛부터 다산(多産)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바위를 숭배했다고 하는데, 성기 신앙(性器信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기 숭배 사상은 수렵 채집의 풍족과 풍농·풍어·다산과 무병 장수를 목적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풍수 신앙·동제·미륵 신앙 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성기 신앙은 성기 모양을 닮은 바위나 기암 괴석 등의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나무나 돌 등으로 성기의 모양을 그대로 만들거나, 은유해서 만든 석장승·돌하루방 등을 기원의 대

  상물로 삼기도 한다. 모두 복을 기원하고 다산과 풍작, 풍어를 비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 삼막사 마애삼존불상

 

 

▼ 다시 삼막사를 거처 거북바위로 가는포장도로 우측에 있는 반월암 앞쪽의 작은 돌탑들.

 

▼ 마애부도

   바위에 새겨서 조성한 부도 탑신을 따로 세우지 않고 바위에 새긴 마애부도는 흔치 않단다. 이 마애부도는 안양 삼막사와 반월암 사이

  바위면에 조성되어 있다 바위면을 얇게 파낸 후 윗쪽에는 꽃무늬를 새겼고, 아랫쪽에는 사리를 안치할 감실을 만들었고 명문을 통해 

 '서영당'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마애부도는 이곳 말고도 합천 해인사 원당암 입구, 청도 신둔사, 상주 북장사 등에도 있단다.

 

 

 

▼ 관악산

 

▼깃대봉국기봉

 

 

▼연꽃바위까지 보이는 곳에 자리를 깔고 떡과 과일로 출출함을 달랜다.

 

▼16:24 장군봉과 민주지산은 생략하고 시흥방향으로 간다. 석수역이라고 누군가가 친절하게 적은 것을 본 탓이다.

 

▼여기 우물은 식수가 가능하다.

 

▼ 16:31 호압사 갈림길

 

▼ 칼로 매끄럽게 갈라 놓은 것을 붙인 듯한 흔적이 있는 바위.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건가...

 

 석구상.

 

▼한우물 조망처

 

 

 

▼16:48 불영암 앞의 한우물

 

▼함께하는 나눔장터의 평상에 걸터 앉아 국수,부침개의 담백한 맛을 즐기고 커피도 곁들여서 나눔에 동참한다.

 

 

▼불영암에서 보는 호압사와 좌에 산복터널,우의 직선은 여의도 방향인데 시계가 좋으면 경치가 죽인다고 불영암에서 나눔장터를 하

  는 아줌마의 말이다.

 

▼ 호압사의 전경

 

 ▼ 제2한우물

 

 

 

▼ 지나온 능선 그림이 연결되어 보인다.

 

 

 

 

 

▼내려오는 방향이 헷갈려서 둘레길로 내려오니 제법 돌아서 가는 느낌이다.

 

▼ 오른쪽에서 내려왔어야 옳았을 성 싶은데...

 

▼호암산과 민주동산은 같은 이름. 동처이명이라 해야하나.

 

▼뭘 그리 열심히 심으세요 하니 상추씨를 얻어서 심고 있는 중이라고...잘 자라서 심는 이의 기쁨 주어라.

 

▼ 18:08 석수역에서 호암산(민주동산)-삼성산을 오르는 들머리가 오늘은 우리의 날머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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