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오름

남한산성 본성 성곽 한바퀴

자어즐 2013. 10. 24. 16:58

 

남한산성 본성 성곽 한바퀴

 

위치 :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은 동경 127도 11분, 북위 37도 28분 지

   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지형 :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

   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평균고도 350m 내외의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

   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구조물 :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

   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1. 누구가 : 집사람(김여사)과 두리

2. 언   제 : 2013년 10월 20일(일요일)  전형적인 가을 날씨..

3. 어디로 : 남한산성

4. 얼마나 : 4시간 45분(식사,휴식시간 포함) 

 

 좋은 날씨에 역사가 살아있는 남한산성을 한바퀴 둘러 보러 아침을 챙겨 먹고 느긋하게 집을 나서다. 상황에 따라 성곽을 돌다 성안마을로

내려가면 순교성지,만해기념관,행궁등 구경할 것이 더러 있으니 둘이 같이 혹은 따로 트레킹과 관광을 하다 합치기가 원활하니 이번에 김여

랑 두리하기에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처음이라 성곽 안쪽을 따라 계단길이 많은 곳을 탓지만 성곽 바깥길과 병행하면 걷기 훨씬 양호한

산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이동경로 : 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북장대터-북문-동장대터-장경사-동문-남장대터-남문

1코스:거리 : 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북문(0.4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산성종로(로타리 0.7km)

2코스:거리 : 2.9km   소요시간 : 60분

산성종로(로타리) - 영월정(0.4km) - 숭열전(0.2km) - 수어장대(0.6km) - 서문(0.7km) - 국청사(0.1km) - 산성종로(로타리(0.9km)

3코스:거리 : 5.7km   소요시간 : 120분

관리사무소 - 현절사(0.1km) - 벌봉(1.8km) - 장경사(1.5km) - 망월사(1.1km) - 지수당(1.0km) - 관리사무소(0.2km)

4코스:거리 : 3.8km   소요시간 : 80분

산성종로(로타리) - 남문(0.7km) - 남장대터(0.6km) - 동문(1.1km) - 지수당(0.5km) - 개원사(0.3km) - 산성종로(로타리(0.6km)

5코스:거리 : 7.7km   소요시간 : 200분

관리사무소 - 동문(0.6km) - 동장대터(1.1km) - 북문(1.6km) - 서문(1.1km) - 수어장대(0.6km) - 영춘정(0.3km) - 남문(0.7km) - 동문(1.7km)

 

▼ 산성역 2번출구로 나와서 50여m 앞의 정류장에서 52번를 타고 남문입구에서 하차하다. 산성로타리로 가려고 했는데 차가 밀리기에 궂이

   5코스를 동문에서 시작 할 필요는 없다 싶어 그냥 내리다. 버스 탄 시간 21분, 도로사정이 괜찮으면 15분정도도 안 걸릴 듯 하다.

 

 

 

 

 

▼ 남문으로 오는데 음악소리 요란한 원인이 길거리 공연 덕분이다. 광주시에 있는 고등학교의 연극반의 퍼포먼스다. 

 

▼ 싸이의 젠틀맨.

 

▼ 11:36 남문에서 출발 준비를 하다.

 

 남문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한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花崗石)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주초석(柱礎石)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문루를 복원하고 현판을

    걸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 성곽일주의 방향을 시각점은 달라도 안내도의 5코스대로 시계반대방향으로 가려 했는데 잠시 방향을 착각하여 시계방향으로 돌게 되는

   것에 시비 걸 사람 아무도 없다.

 

 

 

 

▼ 옜 우리 선조들이 싸울 때 이렇게 했을까 하면서 자세 잡아 보는 김여사. 그냥 웃고 만다.

 

▼ 서울시와 성남시가 잘멋지게 조망되는 성곽길을 산책하듯 걷다.

 

 

▼ 남문에서 0.7km 거리에 있는 영춘정은 통제되어 있다. 안전을 위한 보수가 필요해 보이다.

   일명 팔각정이라고도 하는 정자 영춘정은 수어장대 우측에 있는 천주봉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 남문 아래 있던 것을 옮겨 지은 것이다.
   정자가 위치한 곳에서 서울과 경기지방 일대를 한눈에 모두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산성리 산 29번지이다.

 

 

 

남한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이 모두 16개로서 우리나라의 성 중에서 암문이 가장 많은 성에 속한다. 그중 원성에 11개가 있고, 봉암성

에 4개, 한봉성에 1개가 있다. 원성에 있는 11개의 암문은 남쪽에 있는 것이 4개로 가장 많고, 동쪽에 2개, 북쪽에 3개, 서쪽에 1개가 분포되어

있다. 암문의 구조는 대체로 평거식(平据式)과 홍예식(虹霓式)으로 구분되는데 남한산성의 암문은 16개의 암문 중 6개는 평거식이며, 나머지

10개는 홍예식으로, 평거식 중 3개는 봉암성에 설치되고 1개는 한봉성에 설치되었으며, 원성에 설치된 암문은 장경사 옹성으로 나가는 곳에

설치된 2암문과, 수어장대 서남쪽에 있는 제6암문의 2개만 평거식이고 나머지는 모두 홍예식이다. 6암문은 가장 작은 암문으로 너비는 77cm

이고 높이는 155cm여서 성인이 서서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협소하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지난 197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수어장대이다. 침괘정을 지나 정상을 향해 계속 올라가다가 정상부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서

문이고, 왼쪽으로 돌면 수어장대를 지나간다.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으로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이다. 청량산 정상(해발 482m)에 위치하고 있어 성 안과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원래는 단층 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라 불리었으며 남한산성의

수어(守禦)를 맡았던 수어청이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때에는 인조가 친히 군사들을 지휘, 격려하며 청태종의

13만 대군과 대항하여 항전하던 곳으로 영조 27년(1751)에는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건립하고 외부 편액은 수어장

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인조의 아들인 효종이 볼모로 심양(현 봉천)

에 잡혀 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여 항상 청에 대한 복수심으로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세에 전하고 그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陵所)인 여주 영릉(寧陵)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

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한다. 현 건물은 헌종 2년(1836)에 유수 박기수가 개건하였는데 중층(重層)의 누각 건물로써 그 형태와

구성이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축물 중 특이한 예에 속한다. 지붕과 내부를 모두 이층으로 꾸몄다.

 

 

 

매바위와 전설

남한산성의 수어장대앞 마당 모퉁이에는 매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 수십 년전, 조선 인조왕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 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은 부하의 이인고에게, 북쪽

은 중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키었다. 이인고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단성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 싶이 몰두하였다. 그러는 중에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의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러하였지만 공사를 준공하

기에는 자금은 부족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인고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되어, "이인고는 사리

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는 벽암의 터무니 없이 헐뜯는 말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이것을 믿게 되어 불운하게도 그는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게 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신이 죽기는 합니다마는 신이 죽은 뒤에는 그 진부를

알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는 이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었다. 그러자 뻔적이는 칼날

에 비참하게도 이인고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때 피가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이인고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 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여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

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그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관가에서는 실지 조사를 해 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 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인고가 분담하여

쌓은 성은 금성 철벽같고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야 안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수어장대 근처에다 사당을 세워「청량당」

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인고 부인 송씨도 역시 남편 못지 않게 충렬한 부인이었다. 남편이 축성비 부족으로 낮과 밤 고심하는 것을 보고는 하루는 그가 남편

에게 "멀리 여러 고을을 돌아 다녀서 기부금을 받아 그 축성비를 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는 표연히 집을 나선지 여러 달만에 많은 액수의

기부금을 얻어서 이것을 배에 싣고 세밭나루(삼전도)에 다달았을 때, 뜻밖에도 남편이 죽었다는 슬픈 부고를 접하자, 통분한 나머지 한강에 몸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또한 가상하게 여겨 그 강가 언덕 위에 사당을 세워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퍼온글 : [한국민간전설집], 통문관, 1958. 3-4쪽.

 

맨 오른쪽의 나무가 이승만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것.

 

▼ 부천의 리첸시아 뿐이 아니라 계양산까지 희미히게 보인다.

 

▼ 광주 남한산선 문화제가 18일~20일까지 열리고 있다.

 

 

▼ 12:47 서문(우익문)

  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서쪽 사면의 경사가 급해 이곳에서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

  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初築)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79 개축

  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한

  것이다. 이와 반대가 되는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 손가락 5개를 펴서 제5암문임을 표현하는 김여사.

 

 

 

▼ 예봉산과 또 다른 검단산이 아닌가 한다.

 

▼ 13:06 북장대터.

 

 ▼ 북장대터 옆에서 자리깔고 1시간 15분의 식사시간을 즐기다.

 

 

▼ 김여사 북문의 깃발 외출한 깃대를 잡다.

 

▼ 14:28 북문(전승문).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7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하남시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을 져서 이 문을 통해 산성 안으로 들여갔다고 한다.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 문이 있었다는 선조대의 기록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全勝門)이라

    칭하였다

 

▼ 까미아비는 성곽을 따라 계속 진행하고, 김여사는 카톨릭순교성지랑 만해기념관 등등 성안을 구경하려고 헤어지다. 2시간 정도 후에 남문

   에서 만나기로 하고... 

 

 

 

 

 

▼ 제4암문을 지나고 가파른 계단길을 오른다. 막걸리 한잔의 효과가 나타난다.

 

▼ 14:57 봉암성을 연결하는 제3암문. 벌봉과 남한산은 여길 통과해야하는 데 오늘은 생략하고 성곽만 탄다.

 

 

 

▼ 망월봉 정상부에 자리한 동장대터는 본성에서 재일 높은곳(502m)에 위치 한단다.

 

여장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 벌봉가는 길이고 봉암성의 시작부분...

 

▼ 암문(제2암문)의 앞으로 길게 돌출한 옹성(甕城)이 있다. 장경사신지옹성(長慶寺信地甕城)이다. 한봉성과 봉암성 방어를 위해 설치한 옹성

   이고. 그 끝에는 2개의 포(砲)가 있었는 흔적의 포루가 있다. 

 

 

 

 

 

 

▼ 15:18 장경사를 잠시 들러보다.

 

 

 

 

▼ 스님이 거주하는 심향당의 주련에는 부처를 버리고 홀로서기 하라는 가르침의 글이 있다..

            霜風括地掃枯荄 서리 바람 땅을 감싸고 마른 나무 풀뿌리를 쓸어내네

誰覺東君令已逥 봄바람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오

唯有嶺梅先漏洩 영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

一枝獨向雪中開 눈 속에 가지 하나 홀로 피었네 

丈夫自有衝千氣 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있으니

不向如來行處行 여래의 가신 곳을 향하여 가지마라

 

 

 

 

 ▼ 15:37 동문(좌익문)

   동문은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매우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의 위치와 형태가 선조(宣祖) 때에 이미 보수하였다고 하는 그 동문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조(仁祖) 2년1624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正祖) 3년1779 성곽보수시에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 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

   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 이 문을 좌익문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4대문 중 문루에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은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하나뿐이다.

 

 

 

▼ 동문옆 길건너에 있는 남한산선 표지석.

 

▼ 동문 쪽에서 산성으로 들어가는 차들의 행열이 언제 풀릴련지...

 

▼ 수문 : 남한산성은 해발 370m 이상, 400m 정도의 산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고, 분지형태의 성내부는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에 가깝

   다. 산성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는데 국청사, 천주사, 개원

   사, 옥정사 부근의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해방 전까지

   만 해도 이 개울물로 물레방아 8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 제11암문

 

 

 

 

 

 

남장대터 앞쪽에 제2남옹성치가 있고 그 앞에 보수중인 제2남옹성이 있는데, 김여사 기다리고 있으니 갈길은 바빠도 초행이라 구경할 것은

   하고 간다.

 

 

▼ 코 앞에 있는 검단산.

 

 

 

▼ 16:20 남문으로 원위치하다.

 

▼ 도착하자 말자 올 때 본 고등학생들의 공연이 막 끝나서 구경꾼들이 해산하고 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김여사를 찿는다.

 

 

 ▼ 김여사가 북문에서 행궁으로 내려오다. 초가집은 행궁 매표소.

 

 ▼ 만해기념관을 들어가지 않고 겉만 둘러보다.

 

 

 

▼ 가정집을 한옥식으로 지은 것이 괜찮다 싶어 한 컷 했단다. 

 

 

▼ 남한산성 순교성지(南漢山城殉敎聖地)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81)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 때에는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 주위가 식당들이 많이 들어서 있고 축제 때문인지 너무 시끄러워 성지 분위기를 반감시킴에 김여사 다소 실망하다. 해서 들어가지 않고

    까미아비랑 만날장소인 남문으로 가서 책이나 읽을 요량으로 자리를 뜨다. 

 

 ▼ 남문 앞에서 공연하던 광주시 산하 고등학교 무용부 학생들중에 한 학생의 마네킹 포즈. 같이 사진 찍는 대상이 되어 주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