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서울한양도성길 - 숭례문, 인왕산 구간

자어즐 2022. 6. 4. 22:24

오늘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한양도성길을 마무리하려고 서울역을 향한다. 예보에 따르면 아침 최저 18도이다가 최고 31도까지 올라 따끈할 것이란다. 그나마 햇빛 쨍쨍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오전 10시 숭례문 광장에 모여 숭례문 파수 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조금 일찍 도착한다. 항상 마음을 담긴 먹거리로 친구들에게 봉사하는 3S 총무가 먼저 와 있다. 하나 둘 순서대로 모이더니 가장 멀리 북쪽에서 일찍 출발했는데도 늦었다고 순박한 웃음으로 다가 온 HS가 마지막으로 열둘이다. 일이 있어 YB는 사직터널에서 만나기로 한다. 모처럼 홍이의 합류가 반갑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이 넘어가고, 코르나로 중국 상하이를 필두로 하는 봉쇄조치 등으로 유가와 곡물류 가격의 상승으로 5월 소비자 물가가 14년만에 5.4% 올랐다는 뉴스를 듣는다. 소비자 물가 오른 수치로는 와닿는 게 덜한데 휘발유가 리터당 2,000원이 넘었고, 곡물류의 공급 차질로 밀가루, 식용유등 가공 식품 가격 상승이 가파르다. 게다가 사료 값 상승으로 축산물도 10에서 20% 씩이나 올라 서민들 얼굴에 주름살만 생기게 한다. 우리들의 기호 식품인 커피값도 들석이고 았다고 하니 새로 출발한 정부의 어깨가 무겁고, 잘 대처해 나가기를 바라본다.

 

도성길의 성벽은 남대문로 주변에 대형 건축물이 들어설 때마다 철거되어 숭례문 주변에서는 옛 성벽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서울 상공회의소와 퍼시픽 타워의 성벽 일부가 담장처럼 남아있고, 돈의문 터를 지나 월암공원을 들어서면서 겨우 성벽은 복원되는 듯하다가 마을을 통과하며 잠시 사라진다. 그리고는 인왕산 순성 안내 쉼터부터 우백호 인왕산을 넘어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는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1. 누구가 : 건호, 병희, 수기, 수혁, 승섭, 윤배, 재우, 재현, 철순, 철원, 철홍, 호상이랑 모두 열셋이

2. 언   제 : 2022. 06. 04(토)

3. 어디로 : 서울 한양도성길. 숭례문 구간, 인왕산 구간

4. 얼마나 : 4시간 48분(휴식, 식사시간 + 코스 외 구간 포함)

 

▼ 이동경로 : 숭례문 - 소의문 터 - 정동교회 - 이화박물관 - 돈의문 터 - 경교장 - 월암공원 - 홍난파 가옥 - 사직근린공원 - 인왕산 순성안내쉼터 - 인왕산 정상

               -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창의문 - 수성동 계곡 - 경복궁역

 

숭례문

'국보 1호 숭례문'으로 익숙해 있던 표기가 작년 11월부터 '국보 숭례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순서대로 부여되던 지정번호가 가치 순으로 오인되어 서열화의 논란이 제기됨에 따라 문화재 지정번호를 폐기하기로 했단다. '보물 1호 흥인지문'도 '보물 흥인지문'으로 표기된다. 

유교 덕목 인의예지신으로 지어진 한양도성의 성문 중에 숭례문은 가운데 글자를 따서 예의를 숭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현판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양녕대군의 위폐를 모신 지덕사에 보관되어 있던 탁본 자료와 일본강점기에 촬영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사진 토대로 화재후 복원되었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훼손됐던 숭례문이 5년 3개월에 걸친 복구 사업을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복원된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된 성곽이 다시 생겨나는 등 오히려 예전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고 한다. 동쪽 성곽 53m와 서쪽 성곽 16m 구간이 복원됐고 동쪽 계단도 폭이 2.9m에서 5m로 늘어났다. 
기와는 직접 손으로 만들어 전통 기왓가마에서 구운 것을 사용했고, 채색을 할 때에도 천연안료만 이용했다. 또 한국전쟁 때 피해를 입은 후 임시로 복구됐던 현판도 필체를 바로잡았다. 천정의 쌍룡도도 옛 모습으로 돌아왔단다.

10시가 되자 사회자가 "숭례문 파수의식 재현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로 성문 여는 의식이 진행된다. 숭례문 개폐 의식이 월요일을 제외하고 아침 10시에 문을 열고 오후 3시 30분에 문을 닫는 행사다. 이는 조선 시대 한양 성곽을 지키는 ‘파수(把守) 의식’의 하나로, 수문군이 숭례문의 성문을 여닫는 절차다. 2005년부터 파수의식의 일부인 ‘수위·순라의식’을 재현해왔지만 개폐 의식을 재현하는 것은 올해 3월 15일부터다. 북소리사 울리고 수문군들이 숭례문 앞으로 도열한다. 약시함을 확인하고 성문을 여는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10:17 숭례문 출발
남지터 표지석

숭례문 길 건너 HM빌딩 앞 인도에 남지터 표지석이 외롭게 서 있다. ‘서울 도성(都城)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던 연못으로 장원서(掌苑署)에서 관리하였음’이라는 말만 단순하게 적혀 있다. 연못의 위치나 크기, 이력, 성격 등의 설명이 있으면 와닿는 게 있을 텐데.

 

대한상공회의소 담벼락.
10:28 서소문터

중앙일보 주차장 모퉁이에 표지석 하나가 놓여 있다. 이것이 주위에 소의문[昭義門]이 있었던 흔적을 대신 전해준다. 하지만 오가는 사람들 표지석을 거의 보지 않고 지나친다. 나도 사전에 표지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호암아트홀 쪽으로 건널목을 찾아갔으면 존재의 유무도 몰랐은 게다.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토목국에서 도로 정비를 위해 경매를 진행하고 철거된 후 그 모습이 사라졌고, 지금은 그저 과거 사진을 통해 그 모습을 들여다볼 뿐이다.

길 건너를 가기 위해 호암아트홀을 지나 고가도로 밑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올라와서 순화빌딩을 끼고돌아 좁은 길로 들어서면 앞에 평안교회가 있다. 전 배제 고교 자리와 이화여고 부지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데서 연유하여 수레골 또는 차동이라는 지역명칭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교회 벽에 붙어 있다.

 

마펜젤러 기념공원

평안교회를 지나 길을 우로 틀면 층간 면적의 차이를 둔 특이한 모양의 아파트 앞에 아펜젤러 기념공원이 있다.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출생하여 1882년 펜실베이니아의 프랭클린 마샬대학을 거쳐 뉴저지 매디슨의 드류 대학 신학부를 졸업하였다. 1884년(고종 21) 미국 감리교 선교회에서 조선으로 파견하는 선교사로 임명되어 아내 D. 엘라와 함께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를 통해 조선으로 입국한다. 조선에서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영어교육을 위해 작은 학당을 설립하였는데 처음에는 2명의 학생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20명으로 늘어나자 조선의 황제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시작이었다. 배재의 의미는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뜻이다.

​1902년(광무 6)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44세의 이른 나이에 일생을 마친다.

 

베제어린이 공원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 의병장인 윤희순 의사가 3.1만세 운동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는 동상.

배재학당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 지식인을 배출하였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은 1916년에 세워져 교실로 사용된 배재학당 동관 건물을 그대로 살려 2008년 개관한 서울시 기념물 16호 지정된 건축문화재이다. 아펜젤러가 설립 당시 교훈으로 삼은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지금까지 배재학당의 교훈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과 서울에서 가장 걷기 좋다는 정동길이 만나는 곳에 정동 제일교회가 있다. 붉은색 중간에 흰색의 100주년 기념탑이 홀로 높고 아래에는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의 붉은 벽돌 교회 건물이 몇 채 자리 잡고 있다. 선교사 아펜젤라가 세운 이 교회는 최초란 수식어가 달린 것이 많다. 1987년 완공된 예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당이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19세기 교회 건물이다. 예배당 결혼식이 치러진 것도 처음이고 여름 성격 학교도 최초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파이프오르간도 처음 설치되었다. 대한민국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장로로 시무했고, 바로 옆 이화학당 유관순 학생이 다니던 교회이기도 하다. 

정동제일교회 맞은편에 정동극장이 있다. 1995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를 복원,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범한 문화 공간이다. 326석을 갖춘 공연장을 비롯해 야외마당과 그 외 부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1997년 1월에는 재단법인 정동극장으로 독립했으며, 연극·무용·전통예술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한국 연극과 전통문화공연의 산실로 명맥을 잇고 있다. 
 

교회와 연결되는 이화여고 돌담길 시작점에 보구여관[保救女館]터 안내판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전용병원이고 여성 의사와 간호사 양성소이다.

운치 있는 돌담길을 따라 기분 좋게 잠시 걸으면 이화여고 동문이고 그 안에 이화박물관[심슨기념관]이 보인다. 이화박물관은 이화학당 창립 120주년을 맞아 2006년 5월 31일 개관하였다.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에 준공된 이화학당의 교사다. 옛 교실 형태의 유관순 교실을 운영 중이고, 이화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교육자료를 전시 중인 상설전시실을 통해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 길 건너에는 캐나다 국기가 걸린 대사관이다.

 

10:48 정동사거리 돈의문터

일명 '서대문'으로 널리 알려진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며 의로움(義)을 돈독히(敦)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396년(태조 5년) 한양도성이 마무리되면서 4대 문, 4 소문과 함께 설치됐으며 이후 몇 차례 위치를 옮겼다가 1422년(세종 4년) 현재 정동사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도로확장을 이유로 철거됐고, 방향표지판이 다닥다닥 붙은 가로등 아래 바닥에 '돈의문 터' 안내판이 돈의문을 대신한다. 

 

강북삼성병원에 있는 경교장

강북삼성병원 입구에서 병원 안을 보면 연식이 좀 됨직한 2층 건물이 보인다. 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까지 머물던 경교장이다. 1938년 일제강점기의 부호 최창학이 세운 이 건물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으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숙소와 집무실로 이용하게 되면서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이 바뀐다. 경교는 서대문 인근의 다리에서 딴 이름이다. 김구 선생이 암살당한 후에 경교장은 중화민국 대사관으로 이용되다 전쟁 후에는 월남대사관이 되었다. 1967년부터는 오랫동안 고려병원,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부속시설로 이용되었다.
경교장은 2005년에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었고, 1,2층 지하를 원형대로 복원하여 2013년 전시관으로 개관하였다.

 

월암근린공원

경교장을 나와 서울시 교육청과 국립 기상 박물관 입구를 지나면 월암 근린공원이다. 인왕산 정상까지는 2km 거리다. 왼쪽 아래에 홍난파 집이 보이고 우측의 성곽은 신참 냄새를 팍팍 풍긴다. '봉선화', '고향의 봄' 노래를 적은 판이 있다. 

 

홍난파 가옥

1930년에 지은 이 근대 건축물은 원래 독일 계통 선교사의 집이었다고 한다. 지하 1층, 지상 1층 붉은 벽돌조 건물이다. 당시에는 근처 송원동에 독일 영사관이 있어서 이 일대에 독일인 주거지 형성되었단다.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홍난파는 이 집에서 그의 말년 6년을 보냈기에 '홍난파 가옥'이라 한다.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무지개' 등의 동요를 작곡한 천재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11:05 한양도성 인왕산 순성안내쉼터

한양도성길은 월암공원에서 마을길을 이정표를 따라 인왕산 순성 안내 쉼터로 연결한다. 몇 걸음밖에 있는 홍난파 가옥은 알아서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 있다. 

 

사직근린공원. 암문으로 나가 외부순성길로 갈 수도 있다.
인왕산으로 오르면 뷰가 좋은 곳이 많기에 사직전망대는 패스. 오늘 완전체 13인이 된 기념인데 얼굴이 배경이다.ㅎ
사직근린공원의 내부순성길을 따르면 수성동계곡 방향에서 서대문역으로 가는 도로와 만난다. 항 시 방향에 인왕산을 오르는 등로 계단이 있다.
인왕산 성곽초소. 전기줄을 이렇게 둘 수 밖에 없는지. 멋진 그림 흠집 내기다.,

1968년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목적으로 북악산, 인왕산 등에 30개소 이상 경계초소를 설치하였다. 인왕산은 출입이 통제되다가 김영산,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차츰 개방의 폭을 넓혔다. 2019년 10월에 성벽 복원공사를 완료하면서 경비초소 29개 중 17개를 철거하고 3개소만 스토텔링을 위하여 남겨두었다는 인왕산 성곽 초소 이야기.

 

선바위, 얼굴바위, 모자바위 / 치마바위

인왕산은 골산이다. 그래서 이름을 가진 바위가 많다. 성곽길을 오르면 기가 센 선바위, 얼굴바위, 모자바위와 중종의 첫째 부인으로 비극적 삶을 산 '7일의 왕비' 단경왕후 신 씨가 중종을 잊지 못해 다홍치마를 내다 걸었다는 장소인 치마바위, 기차바위, 범바위 등이 널려 있다.

 

범바위 부근 전망 좋은 곳에서.
범바위에서 정상으로 구불대며 올라가는 성곽길이 힘찬 그림을 만들고, 그 곳에서 7,8분 정상 방향으로 올라 뒤를 돌아 보면 범바위와 곡성이 다른 그림이 된다.
국민의 품으로 돌아 온 청와대, 경북궁, 광화문, 서울정부청사, N서울타워 그리고 서울 중심가 빌딩들이 손에 잡힌다. 시계가 좋지 않아 롯데월드타워가 희미하다.
12:02 인왕산 정상 [338.2m].

정상석은 없고, 죄끔 없어 보이는 정상목도 줄을 서서 인증 샷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만져보는 걸 포기하고 줄이 적은 삿갓바위 위에서 한 캇한다. 서대문구와 종로구의 경계표지도 삿갓바위 옆에 있다.

 

서대문구의 홍제동과 종로구의 무악동, 누상동, 옥인동, 부암동에 걸쳐있는 인왕산(仁王山)은 정상의 높이가 338.2미터이다. 인왕산은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 주산론에 대한 인왕산 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궐터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차천로 '오산설림'을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았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며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는 탄식하며,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라고 하였다. 또 신라 말, 도선대사 산수비기(山水秘記)에 의하면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 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하는 내용이 19세기 '한경지략'에 실려 있단다.

 

정상의 가장자리에서 갈 방향으로 훌륭한 전경이 펼쳐진다. 북한산 보현봉 좌로 비봉능선의 봉우리들이 연결되고 우로 형제봉이 병풍을 치고, 앞에 기차바위 와 오른쪽에 백악산이 전경을 채운다. 중간에 성곽길은 오늘의 주인공이다.

 

기차바위로 가는 갈림길의 성곽을 넘어가자마자 공터에 식당을 차린다. 3S표 문어숙회와 3종 전이 곡차 안주로는 그저 그만이다. 내편이 아닌 아이들 이야기가 있고, 물가에 사회 돌아가는 얘기도 있고, 이번 선거도 양념으로 살짝 들어가고... 50분이 후딱 지난다.

 

다시 순성길로 올라와 10분 못미처에 만난 한양도성 부부소나무. 요상한 모양의 연리지다.

성곽 너머에 심상치 않은 풍경이 눈길을 잡는다. 문인석, 무인석과 석물들이 넓은 마당 가득 촘촘히 메워져 있다. 목인박물관 목석원이다. 7개의 실내전시장에서는 세계 각국의 목인(木人)이 전시되어 있으며 약 3,000여 평 규모의 야외전시장에서는 한국의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동자석(童子石)과 일본·중국 등 아시아의 다채로운 석인,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단다. 목인(木人)은 선조들이 종교 및 주술 그리고 의례에 사용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목조각상이다. 입장료는 인당 10,000원인데 음료 한잔 무료로 제공된다고.

 

13:42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가쁜 숨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들을 위해 폐쇄된 수도 가압장에 윤동주의 시 세계를 담아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 문학관을 만들었습니다. 2012.07.25'

 

13:52 창의문

백악구간 출발하던 창의문으로 한양도성길을 한 바퀴 돌아왔다. 어떤 사람은 전체 18.6km를 한 번에 끝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은 두 번 나누기도 하지만 우리는 욕심 줄이고 세 번으로 나눠 두루두루 구경하며 걸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여유를 가지고 서울 시내를 기웃기웃하며 걸어 볼 수 있겠냐는 물음에 체점하 듯 참 잘했다고 답한다. 친구들과 즐거운 걸음에 우리나라 서울을 조금 더 알게 된 것이 덤이다. 

 

"여기 커피 맛있는 집 있는데 내가 살 테니까 한 잔씩 하고 가자"는 윤배 따라 창의문 앞 삼거리에 있는 클럽에스프레소에 들었다. 밖에 나무 밑 그늘이 시원하다. 인도네시아 가요마운틴 만델링 G1 커피가 좋더라며 아이스로 돌린다. 살짝 단맛이 나는 게 향이 좋다.

 

인왕산 초소책방_더숲II. 전망대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수성동 계곡으로 가는 중간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붐비는 건물이 있다.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건축되어 50년 넘게 경찰 초소로 이용되어온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이기에 ‘초소‘라는 이름을 가진 곳인데 사색하는 쉼터로 만들고자 ‘책방‘으로 꾸몄다. 물론 커피와 차도 준비되어 있고, 빵도 갖추고 있는 베이커리 북 카페이다. 위에 층까지 빈자리가 없어 보이는 게 배가 살살 아프다.ㅋ

 

14:47 수성동계곡. 쉬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다고...

겸재 정선이 서울 장동(북악산~인왕산 사이)의 명소 8곳을 그린 그림을 화첩으로 만든 것이 장동팔경첩이다. 같은 제목의 화첩이 2개 있는데 간송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나씩 소장하고 있다. 내용이 조금 다른데 간송미술관 소장분에 '수성동'이 여기 수성동 계곡과 유사하다. 한동안 비가 안온 탓에 계곡에 물이 없어서 '水聲'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만 기린교 뒤로 인왕산까지 가세한 풍경은 화가의 눈만큼이야 되겠냐 마는 조화로운 멋진 모습이다.

 

윤동주 하숙집 터와 박노수 가옥

1941년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윤동주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4개월 남짓 생활을 하숙집 터와 1937년 한,양 절충식으로 지은 집인데 50년 전 박노수 화백이 소유하여 거주하였고 사후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박노수 가옥을 스쳐 지난다.

 

서촌마을 길
세종마을 음식문화의 거리에 있는 '체부동 잔치집'

이 동네 사는 친구가 가끔 국수 먹으러 오는 가성비 좋은 집이라고 체부동 잔치집을 소개한다. 면과 전 전문집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의 방문 사인이 많이 붙어 있다. 잔치국수 소가 4,000원이면 요즘 시국에 엄청 착한 가격이다. 골뱅이 소면과 부추전으로 안주하고 잔치국수는 둘이 한 그릇 먹는다. 국수 국물이 친구들 입담만큼이나 구수하다. 우리만 들어 간 방의 문 밖 벽에 붙은 사인지 중에 유독 鳶飛魚躍 [연비어약]이 눈이 띤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을 즐김을 이르는 말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일상을 압축한 듯 지금 우리들의 분위기를 기가 막히게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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