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강화나들길 제2코스 호국돈대길

자어즐 2021. 10. 30. 23:13

일본인과 결혼한 사람의 유튜브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일본에 살면서 느낀 한국에 비해 불편한 점과 좋은 점에 대한 내용이다. 물런 그 사람의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전제지만 공감가는 부분이어서 옮겨 본다.

불편한 점은 첫째가 인터넷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과 업로드 속도에 익숙한 우리가 외국에서 우선적으로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것이란다. 두번째는 일본은 거의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사회다 보니 구청등에서 서류 한장 때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용통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현금 사용이다. 카드 안 받는 곳이 많아서 항상 동전 지갑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불편이 있단다. 네번째는 은행업무인데 우리는 계좌이체를 거의 시간에 구애없이 이용하는 것에 반해 일본은 은행의 하루 업무가 끝나면 계좌이체가 다음날로 미뤄진다고 한다. 마지막으로는 대중교통비가 너무 비싸다 전철비용은 물런이고 고속도로 톨비가 세계 최고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환승제도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한다.

반면에 일본이 한국보다 좋은 점은 첫째 깨끗하다는 것이다. 거리가 깨끗하고 하늘이 깨끗하다. 일본은 낡은 것은 있어도 더러운 것은 없다. 쓰레기나 담배꽁초는 찾을 수가 없다. 이런 몸에 밴 습관은 본받았으면 좋겠다. 두번째는 배려가 몸에 베어 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에 대한 조기 교육이 확실하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과일을 깍으면 나오는 조각에 사람 수를 나누어 내가 먹을 수 있는 수량 외에는 더 먹는 경우는 없단다. 세번째는 오지랍, 간섭이 없다. 즉 꼰대가 없다는 얘기다. 네번째는 의외로 내집 마련이 한국 보다 휠씬 쉽단다. 대출이 거의 100% 가능하다고 한다. 마지막은 한국이 가깝다는 것이라고...

언제 아들에게 이런 차이를 물어 볼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승섭이랑 둘이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을 걷는다. 강화도에는 모두 48곳의 돈대가 있다. 돈대는 감시 초소다. 높은 곳, 시야 확보가 잘 되는 지점에 주로 돈대가 설치돼 있다. 돈대가 생긴 게 숙종5년, 1679년의 일이다. 당시 강화 유수 윤이제가 승군(승려군) 8000명과 어영군(왕 호위군) 4300명을 동원해 80일 동안 구축한 48곳의 초소를 말한다. ‘유수’란 왕의 흔적이 남아있는 옛 도읍지, 행궁이 있거나 있던 곳, 국왕의 각별한 관심을 받는 군사 요충지를 관리하고 계획하는 높은 관료이다. 오늘 걷는 갑곶돈대에서 초지진까지에 주요돈대들이 전쟁의 이야기를 품고 배치되어 있다.

 

1. 누구가 : 승섭이랑 둘이

2. 언   제 : 2021. 10. 30(토)

3. 어디로 : 강화나들길 2코스 호국돈대길 갑곶돈대~초지진

4. 얼마나 : 5시간 55분[휴식, 식사시간 포함]

 

▼ 이동경로 : 갑곶돈대 - 더러미선착장 - 용진진, 좌강돈대 - 용당돈대 - 화도돈대 - 오두돈대 - 광성보[광성돈대, 손돌모돈대, 용두돈대] - 덕진진 - 남장포대 -

               덕진돈대 - 초지진

 

검단사거리역 1번출구에서 승섭이랑 8시에 약속 했다. 10분 정도 지각이라고 연락이 와서 옆으로 돌아보는데 쉼터가 완전히 난장판이다. 담배꽁초가 수두룩하고 비닐에 종이에, 한숨 나온다. 이런 건 앞에서 언급한대로 따라갔으면 좋겠는데...

정류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비슷해서 이번에는 90번이 아니고 800번을 탄다. 정차역이 적어서다. 나올 때는 700-1번을 이용할 예정이다.

 

09:42 갑곶돈대 입구

현대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십이삼분 걸어 갑곶돈대 입구에 도착한다. 백m전 쯤 갑곶성지와 갈라지는 곳에 죽산 조봉암선생 추모비와 순국열사 연기우의병장 공적비 지난다. 지단 달에는 강화전쟁박물관이 폐쇄되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입장이 가능하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비, 총 67기의 비석군, 강화전쟁박물관, 400년으로 추정되는 갑곶리 탱자나무

인천 강화군 강화대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만나는 유적지가 갑곶돈대다. 강화대교 아래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야트막한 성벽이 길게 이어진 갑곶돈대는 이웃하는 갑곶성지와 더불어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평화로움 이전, 이곳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특히 갑곶돈은 고려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골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이섭정

‘갑곶’이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 데서 전해오고 있고,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전설도 있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선 정부는 강화도 방어책의 하나로 12진보(鎭堡)를 설치했다. 이후 진보와 진보 사이에도 여러 곳의 돈대를 쌓았는데, 그중 하나가 갑곶돈대다.

실제로 갑곶돈대가 완성된 건 1679년(숙종 5) 5월이다. 1875년(고종 12)에는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이후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 있었고, 1976년에 복원했다.

 

강화 갑곶돈
강화전쟁박물관

한 달전과 다른 건 아름답게 물든 단풍으로 가을 냄새가 돈대를 가득 메우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럽고 은은하다. 아침에 약간의 서늘함이 많이 죽었다. 전쟁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 주차장에 붙어 있는 갑곶돈대관광안내소 옆 탁자에 앉아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리고 강화나들길 2코스 초지진까지 16km의 출발선에 선다.

 

10:24 호국돈대길 출발

갑곶돈대를 주차장 옆을 나와 다리를 건너자 염하강과 도로를 나란히 하는 푹신하게 정리된 길로 들어간다.  더리미장어마을이 2km 앞이다.

 

염하강의 강변을 두르고 있는 철조망이 아직도 유효한 것인가에 의문을 갖는다. 조금만 더 가면 사라지고 없는데 이곳은... 

길 가에 이런 꽃이 간간히 피어 있다. 내가 보기에는 철쭉인데 이 가을에 신기하다. 얘들이 지금 사오월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이 엇새를 닮았나 억새가 구름을 닮았나, 추색으로 물든 문수산은 뒤에서 멀어 진다.
기독교인 3인의 순국터.
10:40 더러미장어마을입구. 더러미포구

장어가 잘 자라는 지점은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이다. 강화도는 서해와 한강,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 기본 환경이 좋다는 뜻이다. 강화도 장어는 보통 갓장어, 또는 갯장어라 부른다. 갯벌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강화도 갯장어는 일반 강물에서 가두리로 양식되는 장어에 비해 비교적 크고 굵은 게 특징이다. 갯장어 식당은 강화도 전역, 특히 초지대교 아래 대명포구 근처와 더러미포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이 갯길이 한강과 서해를 잇는 곳이기 때문이다.

 

갈대와 억새 사이. 도래미마을의 유래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도래미마을은 대몽항쟁 당시 팔만대장경의 판각을 맡았던 선원, 군사요충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용진진, 화도돈대, 용당돈대, 그리고 장어요리로 유명한 더리미장어마을 등 문화, 역사, 자연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농촌마을 이다. 島來美는 아름다워 또 오게 되는 섬이란 뜻이란다.

 

11:06 용진진[龍津鎭], 좌강돈대[左岡墩臺]

용진진은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진보의 설치는 효종 대에 시작되었다. 봉림대군 시절 강화에서 직접 병자호란을 겪었던 효종은 보장처로서의 강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진보 설치에 적극성을 보여 8개의 진보를 세웠다. 용진진은 1656년(효종 7)에 설치됐다. 각 진보에는 첨사(종3품)나 만호(종4품)나 별장(종9품)이 지휘자로 파견되어 해당 병력을 통솔했다. 용진진은 만호가 책임자로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를 관할했다. 문루는 참경루(斬鯨樓)인데 홍예 부분만 남아 있던 것을 복원하고 좌강돈대도 새로 쌓았다. 좌강돈대는 용진돈대라고도 불린다.

 

용진진과 성벽으로 연결된 좌강돈대.
낚시꾼들이 돈대 만큼이나 군데군데 포진헤 있다. 뭣이 잡혔는지 보면 망둥어가 여남은 마리 들어 있다. 염화강 건너 김포CC가 가깝다.
11:52 화도돈대[花島墩臺]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에 쌓은 48돈대 가운데 하나로 오두돈대·광성돈대와 함께 광성보에 속했다. 원래는 화도보 소속이었으나, 1710년(숙종 36)에 화도보가 폐지되면서 광성보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내모 반듯한 구조로 둘레가 129m이다. 한쪽 모서리의 감나무엔 감들이 익어가고 있다.

 

11:55 화도돈대에서 광성보까지 2-B코수 4km 출발지점

출발지점에서 굽어지는 길 꺽으면 탁자가 구비된 쉼터가 있는데 낚시꾼들의 채비들이 탁자를 점거하고 있고 바닥에는 불피운 잔재들이 볼상사나워 식당차릴 생각을 접고 좀더 진행한다. 오두돈대 조금 못간 지점의 작은 공원 같은 호젓한 장소에 자리를 깐다.

 

오늘도 승섭표 전, 어묵탕, 두부, 즉석국수 그 중에 굴전에 바다 향이 난다. 동이가 올 듯한 발언에 량을 더해져서 3인분을 2인분으로 맞추니 배가 터진다.

잠시였던 것이 한 시간이 넘었다. 식당차린 곳에서 백m 거리에 오두돈대 오르는 길이 있다. 주차공간과 화장실이 있어 낚시를 하거나 쉼터로 좋은 장소다.

 

13:12 오두돈대[鼇頭墩臺]

鼇이 자라 오자다. 이름 그대로 자라머리모양의 지형에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오두돈대다. 원형으로 지름은 32m에 달한다. 윗부분에 레고의 요철마냥 한 단이 더 올려져 있는 모양이 다른 돈대와의 차이다.

 

강화외성중에 강화전성[江華塼城].

강화전성은 사적 제452호 강화외성의 일부 구간으로 돌로 쌓은 기초 위에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성이다. 강화외성은 고려 고종(1213~1259 재위) 때 강화의 동쪽해안 23km에 걸처 축조된 흙으로 쌓은 토성이디. 이 토성이 흘러내리자  조선 영조 18년(1742), 강화유수 김시혁에 의해  2년에 걸쳐 전돌로 개축한 성이다.

길은 걷기 좋도록 잘 정비된 부분이 많은데 햇빛 가릴 곳이 없는 구간이 많아서 여름에 통가했으면 궁시렁댈 수도 있겠다.

 

13:46 강화나들길 2-C 초지진까지의 구간 시작하는 곳.
광성보 입구 로터리를 지키는 충장공 어재연 장군.
13:59 광성보[廣城堡]

강화도의 5진 7보 53돈대 가운데 규모가 으뜸이다. 이곳은 염하강에서 물목이 가장 좁아 물살이 세므로 방어에 이롭다. 1658년(효종 9)에 설치됐었고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로저스가 지휘하는 미국 함대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광성보 성문과 나란히 하는 광성돈대[廣城墩臺].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 전시하고 있다.
광성보 성문 안해루 위의 용무늬. 염하강을 낀 외부의 모습.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쌍충비각

여느 공원 보다 잘 꾸며진 광성보는 젊은 청춘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가을색에 흔들리는 걸음으로 손들목돈대로 향하는 길 한 편에 쌍충비각과 심미양요에 순국한 무명용사의 비가 자리잡고 있다.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용두돈대와 바다가 훤히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해 감시와 방어에 큰 역할을 한 돈대로 3칸의 무기고와 3곳의 포좌가 있었다고 한다. 성곽의 길이는 108m이다.

 

수자기(帥字旗)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 진무중군이 광성보에 걸고 미국 군대와 싸웠던 대형 깃발, 장군기이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이 이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탈취해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가 2007년 장기 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안으로 계속 걸어 들면 광성보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용두돈대를 만난다. 그 모양이 용머리처럼 길게 쑥 내민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손돌목돈대의 전진 초소이다. 부드러운 암반의 곡선을 따라 세워져 마치 서양의 성벽을 연상시키는 천연 교두보로, 1679년 세워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성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염화강물의 빠른 흐름이 보인다.

 

14:30 용두돈대[龍頭墩臺]

강화도는 지형적으로 인천, 서울과 가까우며 한강에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하는 섬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오로지 배로만 진입이 가능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한양에 가기 위해서는 강화도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강화도는 수도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로 자리를 잡았다. 병자호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등 민족 시련의 역사적 현장임에도불구하고 성곽이 헐어지고 잡초만 무성하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복원 정화하였다는 내용이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에 표현되어 있다. 

 

광성포대

광성포대는 손돌목돈대 주변 3곳에 설치된 포대로 각각 9좌, 4좌, 3좌의 포좌를 갖추고 있다. 3포좌의 포대이다.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중앙포대는 길이 80m 포좌 크기 약 6m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1875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파괴되었던 것을 2004년 발굴조사때 유적이 확인되어 복원정비되었단다.

 

길은 잠시 숲길은 지난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표시가 절 되어 있어 헷갈릴 일이 없다. 염화강변 길로 덕진진을 향해 간다.

 

15:08 덕진진[德津鎭]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로 들어서자 이쁘게 물든 가을이 마중한다. 잔디에 앉아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있도록 주위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 사적 제226호 '강화 덕진진'은 고려시대부터 강화도를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가 만든 전쟁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 장군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고, 신미양요 당시에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하게 포격전을 벌였단다.

 

남장포대[南障砲台].

남장포대는 대포 10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강화의 8개 포대 중의 하나다. 신미양요에 모두 파괴되었다가 1977년 복원하였다. 실제 포대의 배치가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복원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미관상의 관점이 강조되지 않았는지...

 

15:24 덕진돈대[德津墩臺]

덕진진에 포함된 곳인데 성루에서 남장포대와 덕진돈대는 거의 나란히 붙어 있다. 덕진돈대는 광성보와 초지진의 위치하고 있는 중요한 요새지이다. 돈대 안으로 들어서니 규모가 아담할 뿐 아니라 돌로 쌓아 놓은 성벽이 아니어서 더 정감이 가는 곳이다. 가장자리로 한바퀴 돌라 치면 아래에 비석이 염하강을 보고 서 있는데 대원군이 세운 경고비다.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바다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 배를 지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하라는 것이란다.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겠다는 경고비

학사재 옆길로 해서 덕진교를 지나 오늘 코스의 종착지 초지진을 뚝방길을 부지런히 걷는다. 초지대교가 가까워지고 염화강 건너에는 대명포구와 김포함상공원에 전시된 퇴역 초계함이 보인다. 초지진 선착장이 가까운 넓어지는 길 옆으로에 있는 카페들엔 나들이 객들로 야외 테이블이 의외로 붐빈다만 아직은 성에 안찬다. 마스크를 벗고 사람들로 활기찬 그날이 빨리 와야하는데 참 더디기만 하구만.

 

초지진 선착장과 횟집

열 집 안밖의 가게는 모구 배 이름을 달고 있다. 이 중에 황용호의 문패를 단 집을 두어번 와본 적이 있다. 그리 비싸지도 않으면서 씽씽한 회의 식감이 좋았고 특히나 초밥을 해 먹을 수 있도록 밥이 나오는 게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16:06 초지진

출발한지 5시간 40분 걸려서 오늘의 마지막 요새 초지진에 도착한다. 초지진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鎭)들이 강화도와 강화도 근처로 옮겨오게 되는데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안산에서 옮겨왔다.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 초지진이기 때문에 이곳은 150여 년 전 조선의 최전방이었다. 그런 까닭에 초지진은 서양열강의 침략을 한 번도 비껴갈 수 없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양헌수 부대가 도하했던 곳이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첨단의 소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미 해병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1875년에는 운양호사건 때에는 상륙을 시도하던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렸던 곳이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을 받아낸 초지진은 허물어졌고, 초지진이 관할했던 초지돈대의 성벽 기초만 남았었다. 이후 1973년 복원된 초지돈대에 들어서면 실제 사용했던 대포가 전시돼 있다. 해는 전족산 상정으로 떨어지고 있고 지나온 초지진선착장 앞의 녹색등대는 홀로 딴 세상이다. 길게 늘어선 초지대교는 가깝게 붙어 있다. 돌아 나온 돈대 옆 400녀 년 동안 지키고 있는 두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남아있다.

 

강화나들길 2코스는 걸음걸음마다 나타나는 항쟁의 역사에 머리 숙인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이제야 찾아 본 미안함을 지금이라도 돌아 볼 수 있는 감사함으로 조금이라도 상쇄해 본다. 초지진 앞 버스정류소에서 700-1번 버스를 타고 나오는 마음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