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강화나들길 3코스 고려왕릉 가는 길

자어즐 2021. 11. 27. 22:29

오늘은 행차는 강화나들길 3코스로 고려왕릉 가는 길로 이름 붙은 길이다. 고려 왕릉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 즉 개성 주변에 당연히 분포되어 있지만 몽골의 침략으로 38년 동안 강화도가 고려의 수도가 되면서 여기에도 네기의 왕릉이 축조되었다. 그 중 희종의 '석릉(碩陵)', 원덕태후 유씨(아래 원덕태후)의 '곤릉(坤陵)', 순경태후 김씨(이후 순경태후)의 '가릉(嘉陵)'이 강화나들길 3코스 인근에 있어서 길의 이름이 되었을 게다. 아직 발굴되지 못한 왕릉들이 더러 있다고 하니 여기도 더 있을 지도 모른다.

고려의 역사는 왠지 신라와 조선을 이어주는 단순한 징금다리의 역사로 인식되어진다. 그것은 몸이 멀면 마음도 떠나 듯이 수도가 북한의 개성이여서 서울과 경주 같이 쉽게 문화재들을 접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분열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고 474년 동안 34대의 왕을 거치면서 쌓인 내공이 상당할 건데도, 바뀐 왕조 조선이 그 흔적들을 지워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누구나가 외면해야할 전 왕조를 지킬 수 있었겠는가... 

고려 왕릉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들 또는 조선 왕의 릉들과 비교해 보면 규모나 관리적인 측면에서 쨉이 안된다. 곤릉은 안내표지도 옳게 설치되지 않아서 찾아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더 아쉽다.

선비의 자태를 가진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과 외국 스님이 주지로 있는 연등국제선원을 들며 구경하고 이규보 묘에 서면 더 왕릉 같은 느낌이 든다. 간간히 지나는 숲길은 낙옆 주단이 깔려 차리리 겨울이어서 더 좋다.

 

1. 누구가 : 승섭이랑 둘이

2. 언   제 : 2021. 11. 27(토)

3. 어디로 : 강화나들길 3코스. 온수리 버스 승강장~강화 가릉 주차장

4. 얼마나 : 5시간 45분 [ 휴식, 식사시간 포함 ]

 

▼ 이동경로 : 검단사거리역 - (70번) - 온수리 버스승강장 - 대한성공회 온수리성당 - 강화 학생체육관 - 길작1리 마을회관 - 이규보 묘 - 나들길 흙집펜션 -

                   연등국제선원 - 효자교 - 석릉 - 인천카톨릭대학교 위 숲길 - 가릉 - 강화가릉주차장 - 탑재정류소 - (700-1번) - 검단사거리역

 

강화나들길 행차의 시작은 검단사거리역에 도착하면서이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강화로 들어간다. 오늘은 버스의 목적지가 온수리정류장이다. 700-1번과 70번 두 개 노선이 있는데 정류장이 다르다. 700-1번은 50분을 기다려야 하고  70번은 20분 있으면 온다. 1번 출구에서 길을 건너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면 보이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09:25 온수리도착. 온수리공영주차장, 스템프 찍는 곳, 온수리버스정류장

거의 1시간을 운행하여 도착한 버스정류장 옆으로 온수옛길 상스름 안내판 과 강화나들길 도장함이 나란히 있다. 상그름은 상거리의 강화사투리란다. 온수리 옛길에 모인 상권을 의미한다. 

 

온수리정류장에서 길 건너 길상의원 옆길로 강화나들길 3코스를 출발한다. 길 안내판과 나들길 안내목의 위치가 생뚱맞다. 도로를 따라 끝까지 가지말고 회색지붕 집 앞에서 우로 틀어 골목길로 들면 안내 리본이 붙어 있다. 이제 안내목과 리본을 따라가자. 

 

09:32 성공회 온수리 성당. 중앙 한칸을 종루로 삼은 솟을 대문의 문루, 한옥 사제관

출발해서 오륙분이면 성공회 온수리 성당에 다다른다. 가까운 거리다. 4년 전에 「하루쯤 성당여행」이란 책을 보고 학식이 높고 훌륭한 선비를 닮았다고 비유한 성공회온수리성당을 들린 적이 있다. 오래 끓이고 끓려서 우려 나는 은근한 맛이 풍겨나고 있는 그런 성당이었던 기억이 있다.

이곳 사람들은 온수리 성공회 교회라고 부르고 주보성인의 이름을 따서 성안드레 성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1906년에 탄생한 성안드레 성당의 편액이 붙은 본당. 2004년 축성한 성베드로 성당과 마당의 하트.

온수리성당의 건축은 강화읍성당이나 다른 지역의 교회와 달리 시작에서 축성까지 평신도들의 힘으로 이뤄낸 대한성공회 최초의 성당이다. 온수리성당은 전통 목구조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9칸으로 용마루 양끝에는 십자가가 보인다.
건물 정면 처마 밑에는 연꽃문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진흙 연못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처럼 성서적 의미를 담았다.

 

성베드로 성당 입구에 큰나무 -약 150년 수령의 소나무- 를 보고 성안드레 성당 정면의 길로 경사길을 내려와 우측으로 연결되는 나들길 코스를 찾아간다. 200여m 앞에서 한길를 만나고 좌로 틀어 100m 정도 걸으면 건너편에 소로로 들어가는 입구에 강화나들길 안내목이 있다. 

 

큰 도로에서 소로로 들어가는 입구. 온수성문장로교회. 강화군 노인문화센터.
09:52 강화학생체육관~ 10:00 길정저수지 제방길과 이규보 묘 가는길의 갈리는 곳.
지금은 걷기 좋은 날씨인데 길 가에 얼음이 있어 간밤이 추웠던 모양이다.
10:22 길작1리 마을회관. 이규보선생 묘 들어가는 길.

어지럽던 최씨무신정권의 시대를 산 이규보선생(李奎報, 1168~1241)을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라고도 하고 권력에 아부한 지조없는 문인으로 극단적인 평가도 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 동명성왕에 대한 불후의 걸작인 민족 대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수록한 '동국이상국집'에는 무려 이천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대다수의 작품들이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단다.

이규보의 본관은 여흥(여주)이고 초명은 춘경, 호는 백운거사, 백운산인이다. 지지헌(止止軒), 삼혹호선생으로도 불리는데 지지헌은 그가 뒷날 개경 동쪽에 초당을 짓고 살면서 붙인 당호로 주역의 ‘능히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고, 삼혹호(三酷好)는 평생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긴 풍류거사이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10:33 이규보 묘, 齋室 四可齋, 白雲齋, 영정을 모신 유영각.

이규보 선생의 묘 앞에 서면 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가 앞에 있고, 바로 뒤 좌측에는 墓域淨備紀念碑와 遺影閣이 있고 우측에는 신도비, 白雲靖舍가 자리하고 있다.

재실에 문을 넘으면 四可齊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규보가 부친에게 물려받은 별장 이름이 사가재다. 네 가지가 만족스러우니 살만하다고 전원생활을 말한다. '有田可以耕而食 농토가 있어 가히 양식을 공급할 수 있고, 有桑可以蠶而衣 뽕밭이 있어 누에를 쳐서 가히 옷을 지을 수 있고, 有泉可飮 샘물이 있어 가히 마실 수 있고, 有木可薪 나무가 있으니 가히 땔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야그.

 

이규보선생 묘

이규보 묘는 하단에 호석으로 둘러쳐져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장명등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과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한 쌍의 석양이 있다. 그리고 문무인석으로 보이는 인물상도 양 가에 섰다.

 

이규보선생 묘 옆의 의자에서 커피 한 모금하며 쉬어간다. 10:57 나들길은 묘를 지나 숲길로 잠시 접어든다.

 

11:00 연등국제선원

숲길의 맛만 보고 좌로 틀면 연등국제선원이다. 동행하는 친구가 불자라 절집을 구경한다. 친구부부가 원명스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간간이 이 절을 찾았다고 한다.

연등국제선원은 1997년 성철 큰스님의 제자이신 故 원명스님이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염원으로 창건한 편안한 수행 도량이란다. 전통사찰과는 달리 입구에 있는 공양간이 이국적인 건물로 되어 있고 도량 가운데에는 텃밭이 있어서 시골 분위기가 난다.
인도에서 오신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고 내 외국인 스님들이 항상 거주하며 수행하고 있단다.

 

대웅전
원명스님 법호인 '설산'에서 이름은 따온 설산당. 고경선방. 원명선사 부두비.

고경선방의 문을 살짝 열어 본다. 벽에 승철스님과 원명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고 연등국제선원의 창건주인 설산당 원명스님의 17주기 제단이 차려져 있다. 친구가 하는 삼베에 종교를 떠나 마음을 더한다. 원명스님이 열반에 날이 10월 13일이란다. 1950년 생이라니 우리나이로 55세면 너무 일찍지 않았나 싶다. 고경선방 옆으로 스님의 부도비가 있다. 이십분 가량 절집 구경을 하고 다시 길을 잇는다.

 

11:25 강화나들길 3코스에서 만난 나들길흙집 펜션.

나들길 흙집펜션을 지나 만난 길에서 우로 틀자 말자 우측에 엘에이치농산이 있고 좌측으로 예전 다담원의 공장인지 창고인지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리본은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 공장을 따라가도록 유도 한다. 그 공장 끝에 숲길로 오는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헷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리본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는 게 관건이다.

지도들은 좌측의 벽돌 공장이 아니고 직진하도록하는 것도 있고 아예 좀더 크게 돌도록 그려진 지도도 있어 어느 것을 따라갈지의 선택은 나의 몫이다.

 

숲길의 낙옆은 쌓인 눈에 발이 빠지 듯 하고 어느 시인의 얘기 마냥 밟히는 소리가 부드럽고 정겹다. 숲길을 내려오면 처음에 마니산이 보이더니 길이 조금 굽어지면 진강산이 오라 한다. 가는 길 옆의 우사에 큰 소들은 멀뚱한데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녀석들은 우루루 몰리며 지네들을 봐주라 한다.

 

11:44 효자교. 예비군교장을 만나는 삼거리. 길정저수지 북쪽 끝자락.
길정YB낚시터. 곤릉정류장 삼거리.

길정저수지와 낚시터를 구경하며 걸으니 곤릉버스정류장이 있는 삼거리를 만나 강화 곤릉방향으로 든다. 그리고 길정리 마을회관, 권능감리교회를 지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길정YB낚시터 들어가는 길 맞은 편에 있는 안내목을 못보고 지나쳤다. 저수지 쪽으로 고개를 고정하고 걷다보니 건너편을 살필 틈이 없었음이다.

 

밤낮 구별 못하는 달을 보고 걷는데 곤릉 안내판이 붙은 걸 본다. 그기에 나들길 표지목이 있어서 잠시 나들길을 이탈한 줄 몰랐다. 기왕 지나가는 거니 곤릉을 구경하고 갈 요량으로 찾아가는 길에 나들길 리본과 안내목이 있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잠시 길을 이탈했슴을 알았다. 그런데 곤릉 이정표가 어디에도 없다. 

 

곤릉 가는 길은 못 찾고 다시 돌아 나왔다. 지금에야 차분히 검색해 보니 사유지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판과 금줄을 쳐놓은 곳으로 올라가면 된다는 걸 몰랐다. 강화 곤릉 (江華 坤陵)은 고려 제22대 왕인 강종(재위 1211∼1213)의 부인이고 제23대왕인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으로, 사적 제371호로 지정된 유적지일텐데 들어가는 입구조차 불분명하다는 게 당췌 이해가 안됀다.
  

석릉가는 길
12:24 고려 21대 희종(熙宗)의 무덤인 석릉(碩陵)의 전경

처음으로 접하는 고려 왕릉이다. 신라나 조선의 왕릉에 비해 봉분도 작고 관리되는 규모도 빈곤한 느낌이다. 비해고려의 왕릉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있어야 정상인데 강화에 있는 이유가 뭔고하니 아마도 몽골군의 침공으로 수도를 강화로 옮긴 시기에 조성되었지 않을까. 그리고 이 릉의 주인인 희종은 최씨 무신정권에 유배된 이유도 있다.

돌 몇 계단을 오르면 먼저 고재형님이 석릉을 주제로 쓴 7언절구의 한시 판넬이 보이고, 5단의 석축 뒤로 석벽으로 둘러쌓인 봉분이 앉아 있다.  

강화 석릉의 능역은 가로 20.5m, 세로 31m의 규모로 이루어져 있고봉분은 지름 4m, 높이 1.8m 규모다.

 

곡장앞의 석인상은 훼손되어 상하가 분리되어 있다. 중앙에 고려熙宗碩陵 표석

강화 석릉(江華 碩陵)은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위치한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사적 제369호로 지정됐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

 

12:35 어두마을 진강산 갈림길

석릉에서 돌아나와서 어두마을로 가는 길은 누가 청소를 한 것인지 낙옆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다. 강화둘레길은 석릉 350m 지점에서 진강산 방향으로 진행된다.

석릉 앞에 식당 자리가 좋았는데 선객이 있어 진강산 방향 표지목이 있는 낙엽 푹신한 곳에서 자리를 깐다.

 

인천카톨릭대학교 뒤 숲길

길 옆에 물탱크에 잠깐 한누 판 사이 오른쪽으로 가야 하는 이정목을 지나치는 바람에 다리가 잠시 고생을 한다. 카톨릭대학 테니스장 옆으로 해서 대흥부락으로 가다가 푯말이 없고 나들길이 아닌 감이라 다시 돌아가서 여기 이정표를 찾는다. 진강산을 올라 보지 못한 걸 아는 지 진강산등산로가 유혹하는 걸 모른 척 한다.

빨간 고추가 달린 고추나무를 방치해둔 모습이 이상하다. 고추를 따서 자리 위에 펴쳐 말리는 것만 본 까닭에 애써 농사지은 것을 왜 저렇게 두는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말리는 게 맞는 건가? 

 

14:48 진강정

'진강산 기슭에는 고려 희종의 능인 석릉을 비롯하여 가릉, 곤릉등이 있어 옛 도읍지의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 유명한 진강목장이 잇던 곳으로 조선조 효종임금이 타시던 명마 벌대총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라고 진강산 유래가 게시되어 있다.

 

15:01 사적 제370호 강화 가릉(江華 嘉陵)

순경태후 김씨(1,222~1,237)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고려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익공(莊翼公) 김약선(金若先)의 딸이다. 고려 무신정권기 집권자 중 한 명인 최우(崔瑀)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원종이 태자가 되기 이전 입궐하여 경목현비(敬穆賢妃)로 책봉되었다. 1235년(고종 22)에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1236년(고종 23) 충렬왕(忠烈王)을 낳고, 1237년(고종 24) 훙서하였다. 원종이 왕위에 올라 1262년(원종 3)에 추봉(追封)하여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삼았고, 아들 충렬왕이 즉위하여 1274년(충렬왕 즉위년) 12월에 순경태후로 추존(追尊)하였다. 1310년(충선왕 2) 원(元) 무종(武宗)이 제서(制書)를 내려 고려 왕비로 추봉하였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 개경에서 강화로 수도를 옮겨 1270년(원종 11)에 환도하였기에, 순경태후의 능은 개경이 아닌 강화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강화 가릉은 강화 진강산에서 남으로 뻗어내린 능선상에 위치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상을 떠난 날짜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244년(고종 31)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가릉의 안내문에 충렬왕을 낳은 이듬해인 1237년(고종 24)에 16세의 나이에 하직한 것으로 나와 있고 시아버지인 고종이 이규보에게 짓게 한 '동궁비주애책문(東宮妃主哀冊文)'에 '14세에 빈으로 와서 16세에 가버렸다'고 쓴 것에 의거 수정해 두었다. 우리 나이로 17살의 어린 나이지만 벌써 아들과 딸을 낳았으니 작금에는 상상밖의 이야기다. 중학생이 아이를 낳은 경우이긴 한데 결혼했기에 아동 성폭행이라할 수도 없고...

그리고 당시의 최고 권력인 최충헌의 외증손녀이기도한 금수저 순경태후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지만 우리 역사속에는 여자는 이름없는 존재일 뿐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로 기억되는 누구가는 여자다.

 

철망 울타리가 쳐져 안으로 들어가 못했다만 외관으로 봤을 때 내부 석실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앞에는 문인상이 마주보고 서 있도 뒤에는 석수가 한 쌍이 릉을 지키고 있다. 능역은 가로 11m, 세로 14m로 50평에 조금 모자라는 규모이고, 봉분은 지름 7.6m, 높이 2.5m 이다. 석실은 가로 2.55m, 세로 1.68m, 높이 1.78m 의 크기다.

 

15:13 강화나들길 3코스 종점. 강화 가릉 주차장

아뿔사! 강화남로인 도로로 막 나가는데 우리가 타야 할 700-1번 버스가 사정없이 지나간다. 탑재삼거리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는 이 버스외에는 대안이 없다. 진작에 버스시간을 체크했어야 했다는 자책을 해보지만 이미 떠난 후라 기다리는 수 밖에. 무려 50분씩이나.

 

둘의 뒷풀이 대방어. 대방어회는 취아전에서 먹어야 맛도 모양도 부위도 최고다.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