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여행

갑곶순교성지[甲串殉敎聖地]

자어즐 2020. 5. 3. 17:26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오늘 목적 중에 하나인 쑥을 케러 평화전망대 방향으로 가다가 어느 곳에 내렸다. 어디에 쑥이 많은 지 모르고 무작정 온 곳인데 김여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한 봉지 가득들고 차로 들어 온다. 강화는 몸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사자발쑥이 유명한데 우리는 겸사겸사 쑥떡 가공용으로 할 일반 쑥을 얻는다. 가천대 부근을 추천 받았지만 갑곶순교성지를 갔다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멀다. 원래 고려산 아래로 가려던 것이 인간내비의 잘못된 입력으로 엉뚱한 곳으로 왔어도 목표달성을 했으니 용서가 된다.

 

오전에 들어온 차들이 강화를 빠져 나가는 시간에 맞물려 강화읍내를 지나는 순간부터 주차장이다. 강화대교를 못미쳐 갑곶교차로에서 갑곶돈대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갑곶순교성지로 겨우 찿아 든다. 시간은 오후 5시 반을 넘어간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가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고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이슬로 사라졌었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5년 전 평양에서 조선인들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책임을 물으면서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구한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를 물어 강화에 살던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1.누   가 : 김 바실리아와 두리서

2.언   제 : 2020년 5월 1일(금) 노동절

3.어디로 : 갑곶순교성지

 

▼ 갑곶순교성지 위치

 

 

신촌  3000번(직행)  신촌 → 송정역 → 김포 → 마송 → 김포대학 → 현대아파트(하차 후 갑곶돈대 방향 15~20분 도보 이동)

영등포  88번  영등포 → 당산역 → 송정역 → 고촌 → 김포 → 마송 → 김포대학 → 강화 청소년수련관(도보5~10분)

일산  96번  호수공원 → 일산마두역 → 백석역 → 김포시청앞 → 누산삼거리 → 마송 → 김포대학 → 강화 청소년수련관

인천  70번  인천시외버스터미널 → 석바위 → 제물포 → 송림동 → 검단 → 양곡 → 김포대학 → 강화 청소년수련관(도보5~10분)

부평  90번  부평(부평시장) → 계산동 → 검단 → 양곡 → 마송 → 김포대학 → 강화 청소년수련관(도보5~10분)

 

▼ 안내도. 성지 입구 도로 건너는 갑곶돈대가 위치하고 있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 고인돌 유적이 남아 있는 선사시대부터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서구의 침략세력이 충돌하는 전장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을 거치면서 항쟁과 개항의 중심에 선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역사의 축소판인 강화도, 신앙인에게는 구한말 신앙 선조들이 피흘린 순교의 섬인 이곳의 관문에 있는 갑곶순교성지를 늦은 시간에 찾았다. 

 

 

▼ 성모상과 철갑을 두른 듯한 기념성당.

 

 

 

 

▼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하는 예수님이 여기에 오셨구나. 

 

 

 

 

 

▼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때 순교한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3위 기념비.

 

 

 

▼ 갑곶십자가.

 

 

 

 

 
박순집(베드로, 1830~1911)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 바오로와 김 아가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등의 시신을 수습해 노고산에 안장했다. 부친은 몇년 뒤 시신을 선산인 삼성산으로 이장하고 아들 박순집에게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알려 드려야 한다"고 일렀다. 박순집은 1901년 삼성산 순교자 시신 발굴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서울 남문 밖 전생서(현 용산구 후암동)에 살던 그는 17살(1846년)때 김대건 신부가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로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하기도 했다.
훈련도감 군인이 된 그는 또 병인박해 때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 푸르티에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후 몇몇 신자들과 새남터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도 수습해 매장했다. 박해의 광풍이 멈추자 그는 프랑스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데도 관여했다.
1888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가 조선 순교자 행적을 조사할 때 그는 교회 법정에서 자신이 목격하고 들은 것, 시신을 묻은 곳 등을 상세히 진술했다. 그가 행적을 밝혀낸 순교자는 150명. 그의 증언록(병인사적 박순집 증언록)은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있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박해사의 상당 부분이 유실됐을 것이다.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베드로, 1830~1911) 묘.

 

 

 

▼ 염하강을 이어 놓은 강화대교. 아직도 옛다리는 남아 있는데 이것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 두 줄기로 갈라져 자란 세쌍둥이 은행나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 여기서나마 십자가를 제 뜻대로 고를 수 있어 다행이란다.

 

 

▼ 혼자가 아닌 세분의 순교자와 함께14처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한 처 한 처 십자가의 의미를 가슴에 새기며 성지순례를 떠난다. 한개의 처를 놓쳐서 다른 곳에서 빌려 온 것인 데 어느 것일까?

 

 

  

 

 

 

  

 

 

 

  

 

 

 

  

 

 

 

  

 

 

 

  

 

 

 

  

 

 

 

 

 

 

 

 

▼ 십가가의 길을 지나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다.

 

 

 

▼ 성지방문 확인 도장은 성당문 입구 좌측에서 찿았다. 십자가의 길에 세 군데 스템프 보관함의 도장은 성지 방문 확인과는 별도다. 평일은 매일 11:00에 미사가 있다.  

 

 

 

 

 

심도역사문화길로 불리는 강화나들길1코스의 마지막 지점에서 여기 갑곶성지를 만나게 되니 청주교인의 성지순례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레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종교를 떠나서 이곳을 명상하며 지나가는 것도 괜찮을 성 싶다. 

 

 

 

▼ 김포CC 입구를 지나 도로 우측에 있는 두부향에서 도부정식으로 저녁을 해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