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도 다을새길

자어즐 2022. 3. 20. 08:04

아침에 베란다 창문을 눈발이 두드린다. 겨울로 역 주행하는 지금의 봄은 '미친 X 널 뛰는 듯한다'는 소리가 딱 맞다. 3월 중순에 서울 쪽에 눈 내리는 게 자주는 아니고 11년 만에 오는 것이란다. 오늘 강화나들길 9코스 교동도 다을새길을 가기고 한 마음이 흔들린다. 기온이 영하가 아니어서 도로에 쌓이지 않아 다행이고 비가 아니어서 차선이라 그냥 '고'한다. 앞 유리창에 부딪히는 눈은 바로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산길은 눈이 많이 쌓이겠다는 친구의 말대로 이 봄에 한 겨울의 한라산 같이 눈꽃이 피었다. 이달 4일부터 10일간 울진 삼척을 비롯한 동해안의 최장 최대의 산불로 애를 태웠는데 초기 단계에 이런 눈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되면서, 지난 일주일간 감염자가 일평균 40만이나 발생하여 이젠 거의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잠시 보이지 않곤 한다. 수상한 시절이 이상한 현상을 가져 온다. 신랑 되는 이가 코르나 19에 감염되어 화면으로 얼굴을 비추고 신부만 입장한 비대면 결혼식을 했다는 황당한 뉴스가 있다. 또 돌아 가시는 분들이 많아 장례식장을 순서를 기다려야 하고 그래서 5일장은 예사가 되었다는 얘기가 사실이 된다. 관혼상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번에 거래처의 부고에 조화를 보낼려니 지방에는 꽃이 동이 나서 보낼 수가 없다는 대답에 할 말을 잊는다.

 

월선포 선착장행 버스는 강화터미널에서 군내버스 18번이 운행되고 있다. 하루에 11회 운행하는데 보통 1시간 20분에서 한 시간 30분 간격이다. 차 한 대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06:10, 07:30, 09:00, 10:25, 11:40... 이 강화터미널 출발 시간이다.

시간 절약을 위해 차를 가져간다. 제1순환고속도로 김포 IC에서 내려 김포한강로를 달리다 48번 국도로 길을 갈아타고 끝이 교동대교다. 대중교통에 비해 걸리는 시간은 반이면 충분하다.

 

1. 누구가 : 3S랑 둘이

2. 언  제 : 2022. 03. 19(토)

3. 어디로 :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 

4. 얼마나 : 4시간 45분[식사, 휴식시간 포함]

 

▼ 이동경로 : 교동도선착장(월선포) - 교동향교 - 화개사 - 화개산 정상 - 화개약수,효자묘자리 - 천화문 - 대동초교 - 대룡시장 - 남산포 - 교동읍성 - 동진포

             - 월선포

 

교동도는 강화군의 면소재지 섬이다. 강화도 섬 중에서 38선 근처 황해해역에 위치해 있다. 북한과 거리가 2.6km에 불과한 접경지역의 섬이다. 한 때 탈북자들이 수영을 통해 교동도로 왔을 정도로 강줄기 크기의 해협이 남과 북의 경계이다. 전 지역이 민통선 및 군사시설보호구역이고 어로한계선으로 조업이 제한받는다. 눈으로 직접 북한 땅을 조망할 수 있다. 

  

09:15 교동대교. 09:26 월선포선착장.

교동도는 민간인통제구역이어서 교동대교를 넘어가기 전에 차량 등록을 하고는 와이퍼로 차 앞유리를 닦으며 교동대교를 지난다. 예전에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두 달 만에 이 다리를 넘었으니 벌써 8년이 지나간다. 도착한 월선포 선착장은 날씨에 비례해서 인적이 없다. 주차장에 그 많은 차들은 어디로 갔는고. 바다 물결은 짧게 파동을 만들고 지나온 교동대교가 희미한데 별립산이 없는 게 당연하다.

 

월선포

강화나들길 9코스 ‘다을새길’은 월선 선착장(교동도 선착장)에서 출발해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월선포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차에서 커피와 사과 한 조각 먹고 월선 선착장을 출발한 시간은 09:49분이다.

 

월선포 선착장으로 차로 들어가면서 본 교동교회 옆 도로를 지나면 상룡리 마을 입구를 알리는 장승이 객을 환영한다. 야트막한 산은 하얀 이불을 덮으려고 한다. 

 

포장도로에서 화개산 자락 숲길로 들어서 교동향교로 넘어간다. 가는 길에 벤치들로 쉼 공간을 만든 곳에 있는 안내판에는 여기가 안양사지였슴을 알린다. 안양사는 화개사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될 정도로 그 연혁이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단다.

 

10:29 교동향교[喬桐鄕校]

외삼문을 들어서면 학생들을 가르친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학생들이 기거했을 동재를 지나 대성전을 들어가는 문은 우리나라 최초로 공자의 초상을 모셨고 또 동국 성현 18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인 만큼 고개 숙이고 들어오라고 낮게 되어 있다.  

 

대성전. 내삼문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서울의 각 읍에 조상이나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10:45 화개사

주련이 없어서 인지 절집 같지 않은 화개사는 인천 강화군 교동면 화개산 중턱에 있는 고려 시대 때 창건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왕조 말기 목은 이색 선생이 1341년 이곳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1840년과 1967년 두 차례 화재로 소실 이후 1968년 재건했다. 법당 옆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200년 수령의 소나무가 우뚝 서 있다.

 

보호수 소나무

화개사에서 화개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화개산 정원 조성사업으로 인하여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안내판으로 길을 막는다. 잠시 고민하다 그냥 가면 후회할 것 같아 올라가 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돌아 나올 생각으로 슬쩍 금줄을 넘는다. 

약 20분 쯤 오르니 전망대인 듯한 구조물 공사 현장이다. 그곳 옆으로 지나는 구간이 좁긴 한데 이삼십 미터밖에 안되고 위협적이지 않아 걍 통과한다.

한 겨울 같은 눈이 재법 쌓인다. 공사현장에 정신이 팔려 봉수대를 지나는지도 몰랐다.

 

자연을 그대로 두지 왜 저런 괴물을 새우는 지 모를 일이다. 시계가 막힌 것이 차라리 위안된다. 철 지나서 생산된 한 겨울 설산이 눈을 기쁘게 한다.
강화 화개산 청동기 암각화.
정상 코밑에 핀 눈꽃. 봄의 길목이라고 누가 믿을까?
11:22 화개산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눈이 주는 눈의 즐거움이 있는 반면에 259m인 화개산 정상에서의 경관은 없다. 석모도, 볼음도, 주문도 등 인천의 여러 섬과 북한의 연백평야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아쉽게 사라진다. 예전에 왔을 때 정상에 대운정의 문패를 단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화재 감시탑만 남아 있다.

 

민간신앙의 흔적 성혈바위
11:34 화개산성 안내판. 화개약수 인근 지역
안타까운 전설의 효자묘
화개약수

하산 길에는 앞서 가는 친구의 발자국만 생겨 있다. 연산군유배지 방향으로 좌회선 하여 내려오는 곳에는 스카이 정원, 모노레일, 5색 테마 정원을 조성하고 있는 현장을 동행한다. 연산군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만 달랑 서 있었던 걸 스토리 있게 조성해 게 멀리서도 잡힌다. 올 4월에 준공 예정이란다.

   

11:49 천화문. 모노레일 출발지.

왼쪽 화개산 정원 조성 현장으로 시선을 뺏겨서 천화문 아래 있는 고구리 조선시대 한증막을 지나쳤다.

 

화개산 정원 주차장.

넓은 주차장을 보고 왼쪽으로 나들길은 연결되고 주민들이 통제하고 있는 위로 계속 직진을 하도록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통제하는 도로로 내려오는 바람에 잠시 길을 이탈한다. 

"어디서 오는 길이세요?" "화개사에서 산을 넘어 내려오는 길입니다" "이곳에서는 안전사고의 위험으로 산행을 통제하는 데 반대로 와서 넘어올 수 있었네요" 한다.

 

12:12 교동초교.

한국농어촌공사 옆으로 내려오는 길이 지도의 길이다. 나들길 표지목을 입구에서 만난다.  교동초교 부설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지난다. 교동초교는 전교생이 34명인 작은 학교지만 115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는 학교다. 

교동도는 ‘구름에 뜬 섬’이라는 뜻의 대운도[戴雲島]가 원래 이름이었다. ‘하늘에 닿을 새’라는 의미로 달을신[達乙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을 두어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 때 교동현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강화 나들길의 교동 코스 중 하나인 ‘다을새길’은 옛 지명 달을신의 소리음인 다을새의 이름을 따서 탄생했다.

 

12:14대룡시장

'어서오시겨' 옛 시간으로 여행 가는 교동 대룡시장. 6.25 때 북한 지역과 최단거리 2.4km 안팎의 이곳으로 잠시 피난 온 연백 출신 실향민들이 남북 분단으로 왕래가 끊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고향의 연백 시장처럼 대룡시장을 만들어 현재의 골목시장으로 발전시켰다. 대룡시장은 이후 70여 년간 교동도 경제 발전의 중심지였다. 6~70년대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길 안팎의 낡고 허름한 1,2층 건물들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건축자재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입구 농산물 구멍가게에 손글씨로 적은 아날로그 가격표가 옛 기억을 소환하고, 쌀을 파는 교동은혜농장의 빛바랜 대통령 포스트가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1박 2일 촬영지였던 교동 이발관은 분식집으로 역할을 완전히 바꿔 있고 영심이네는 옛 건물 원형 그대로를 살린 복고 카페다. 

 

화글와글 거리에 말타기 모습을 재현하고 옆으로 벽화거리가 있다.
조롱박거리, 손님에게 소문난 영안정륙점, 쌍화차로 유명한 교동다방 입구에 붙은 메모지들. 제비거리 만물점방 행복전파사. 은자매 떡방아간.
황해도 강아지 쩍으로 유명한 청춘부라보 현수막. 추억의 뽑기 가게에는 부모 손잡은 아이들이 작은가게를 채운다. 식당이 된 교동극장, 전통쌍화차를 파는 교동궁전다방. 옛 교복을 빌려 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교동스튜디오도 극장거리에 한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찾아 오는 제비가 대룡마을의 상징인 게 시장 구석구석에서 나타난다. 둥지 거리, 제비 거리, 와글와글 거리등 제비와 연관된 이름이 그렇고 처마에 제비집을 간간이 찾아볼 수 있는 게 그렇다. 아마도 실향민인 연백 출신 주민들은 해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제비들에게 대리만족의 공감대를 느껴 제비가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 보살펴 주기 때문이다.

2014년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2개월 후 김여사랑 방문했을 때랑 그대로인 듯해도 많이 변해 있다. 연세 많은 옛 주인장에서 세대교체가 되면서 간판은 그대론데 내용은 다르다. 대교 개통과 매스컴의 소개로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이전만 해도 단체 관광버스가 드나들었던 곳이다 보니 타지인의 유입도 당연하다. 다만 대룡시장이 음식점과 카페로만 채워지지 않고 본래의 모습이 더 이상 상해 지지 않기를 바랄 뿐.

 

12:32 마을정자.

나들길은 교동우체국 못미처에서 우로 꺾고 작은 마을을 거친다. 마을 정자에서 식당을 펴고 30여분 쉬어 간다. 논 사이의 포장길은 산과 달리 눈이 오자마자 녹는다. 중간에 만난 표지목의 화살표가 알쏭달쏭 하여 직진했더니 나들길 경로를 이탈했다. 평화자전거 길인 회수길을 만났다. 회수길은 교동도 가장자리를 한 바퀴 도는 30km의 자전거 길이다. 회수길의 구간인 해안호수길은 나들길과 나란히 가다가 만난다.

 

13:16 평화자전거길 안내판. 해안호수길. 화개산. 해안호수길과 나들길 합류 지점.
13:41 삼도수군통어영지 였던 남산포구

53m의 낮은 남산에 내려 앉은 남산포 선착장은 객 한 사람 없이 조용하다. 앞으로는 별립산과 석모도의 산들도 구름과 맞닿아 침묵한다. 삼도수군통어영지 안내판과, 작전지역 해안 출입 자제 안내문, 교동 추억여행 안내판 등 안내판들만 선착장을 지킨다. 고려 때 중국 사신이 도착하여 맞이하던 곳은 아주 옛 얘기다.

입구 천막 가게에서 새우젖과 말린 새우를 사고 꽃게튀김을 맛보던 그때는 앉을자리가 없을 만큼 붐비던 곳도 옛 말이다. 

 

남산포에서 교동읍성사는길 1km
13:56 교동읍성

교동읍성 (喬桐邑城)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 규모다.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읍성으로 동남북 세 곳에 성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현재 동문과 북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문루가 무너져 홍예(虹霓)만 남아있던 것을 2017년 복원하였다.

 

14:08 동진포

'교동도에 영이 설치되어 읍성이 축조된뒤 가장 번화했던 포구가 바로 동진포다. 서울과 해주를 잇는 주요 관문이었던 동진포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는 바다 날씨를 살피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기상이 좋으면 바로 배를 띄워 중국으로 향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동진원이라고 부르는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길을 떠났다. 동진포를 떠나 서해로 나아가는 이들을 배웅하던 동진송객은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이를 교동팔경중 하나로 교동 읍지에 기록하고 있다.'

 

바닷길

조사들이 늦은 점심을 한다고 붐비고 해안 정자를 뒤로하고 우리는 낚시터를 이루는 수로와 바다 사이로 가르는 걷기 멋진 나들길을 따라간다.

 

별립산과 월선포가 가까원지는 해안호수길
14:34 월선포

민통선을 넘어 월선포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날씨가 신통찮아 기대를 하지 않고 출발했었다. 화개산 자락 숲길을 지나 공자 초산을 전국 최초로 모셨다고 하여 향교 중의 으뜸인 ‘수묘首廟’라 칭하는 교동향교를 지나고 화개사를 거처 입산통제 간판을 모른척하고 화개산을 오르면서 때 아닌 눈꽃에 간사한 마음이 180도 바뀐다. 금줄을 넘지 않고 화개사에서 발길을 돌렸으면 관계자에겐 미안하지만 엄청 억울할 뻔했다. 우리만의 발자국을 만들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대룡시장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다. 

조용한 포구를 지나고 수로와 바다 사이 마른풀들과 조화된 운치 있는 나들길은 걷는 피곤함도 잊게 만든다. 예전의 모습과 비교하며 오늘도 기억에 남는 즐거운 걸음을 걸었다.

 

한글점자 '훈맹정음(訓盲正音)'을 만든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가 복원.

월선포에서 교동대교로 나가는 길 한쪽에 송암 박두성 선생 생가터 복원을 놓은 곳으로 잠시 차를 세운다.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생가 인근에 박두성 선생의 생가 모습과 점자 기념벽, 흉상, 녹지공간으로 구성된 기념공원을 조성해서 4개월 전인 작년 11월에 준공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을 창안,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1888~1963)은 강화군 교동면에서 태어났다. 1906년 한성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현재 국립 서울맹학교 전신인 제생원 맹아부 교사로 부임하며 시각장애인 교육에 뛰어들었다. 맹인으로 불리며 사회적 천대를 받던 시각장애인의 사회적응 교육에 관심을 갖고 한글점자 모델 연구에 들어가 1926년 11월 4일 마침내 6 점식 점자 체계를 도입해 완성하였다.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을 본떠 훈맹정음이라 이름을 붙였다.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는 작고 둥근 6개의 점을 볼록하게 돌출되게 한 것으로 6개의 점이 모여 한 칸이 된다. 이 6개의 점은 세로로 3점, 가로로 2점으로 구성되며, 각 점에 1에서 6까지의 번호를 붙여 사용한다. 이 6개의 점 중에 어떤 점이 돌출하는지에 따라 63개의 각각 다른 점형이 생기며, 이 점형에 의미가 부여된 문자이다. 이처럼 훈맹정음은 무궁무진한 한글을 한정적 자원 안에서 쉽고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뛰어난 점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훈맹정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