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

강화나들길 6코스. 화남생가 가는 길

자어즐 2022. 2. 6. 12:44

1만 명 돌파 일주일 만에 하루 확진자 수 2만 명 돌파되니, 고위험군만 PCR 검사를 하고 나머지는 신속항원검사로 검사 방법 전환한다. 동네의원 1,000곳서도 진료한다. 오미크론 비중이 80% 급증했으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위중증은 안정적이란다. 그리고 확진자 수 십만도 눈 앞에 있어서 영국, 스페인, 일본 등의 나라와 같이 코르나 바이러스를 계절성 독감으로 발표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여파로 자가검사키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면서 에스디바이오센서등 진단키트주가 급등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오늘로 예정된 이륙산악회의 산행 계획을 강행하기에는 무리여서 이틀전에 취소공고를 한다. 그래서 대타로 3S와 강화도 나들길로 일정을 잡는다.

 

강화도 선비 화남 고재형(1846~1916년)이 환갑을 맞은 나이인 1906년 봄, 당시의 나이로 봐서는 상 늙은이가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 마을을 출발해 강화도 기행을 떠났다. 400㎞를 걸어 17개면 100여 마을을 돌아보고 256수의 칠언절구 시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겼는데 그의 아호를 따 '화남길'로도 부른다.

'강화나들길'은 심도기행에서 출발했다. 선비가 나귀를 타고 다녔던 길, 그것이 바로 오늘의 강화나들길을 있게 한 밑거름이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이다. 몽골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온 고려 무신정권은 39년 동안 난리를 피해 강화에서 살았다. 그때 강화의 인구는 삼십만 명이 넘었고 개경의 궁궐을 본떠서 강화에도 궁궐을 지었다. 심도의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오늘 걸을 길이 강화나들길 6코스, 선비의 생가를 지나는 길이라 '화남생가 가는 길'로 부제가 붙었다.

전철역에서 검색한 아침기온은 영하 9도이고 체감온도는 영하 12도, 핫팩을 깜박하고 안 가져 와서 기온과의 싸움도 오늘 감당해야할 몫이다.

 

1. 누구가 : 3S랑 둘이

2. 언   제 : 2022. 02. 05(토)

3. 어디로 : 강화나들길 6코스[화남생가 가는 길]. 강화버스터미널 - 광성보

4. 얼마나 : 4시간 37분[식사, 휴식시간 포함]

 

▼ 이동경로 : 강화버스터미널 - 도감산 숲길 - 선원사지(선원사) - 월하공원 - 연리보건소 - 삼동암천(조경교) - 영모사 - 화남생가 - 능내촌입구(능내버스정류장)

                 - 오두보건진료소(천주교 오두리공소) - 광성보

 

강화버스터미널. 10:03 강화나들길 6코스 출발지점.

검단사거리역에서 강화버스터미널까지는 한시간 가량 버스를 탄다. 강화나들길을 걸으면서 여기를 자주 오게된다. 터미널 관광 안내소 옆의 대형 모니터로 종점인 광성보에서 귀가를 위한 버스 시간을 검색하고 담아둔다. 애매하지만 군내 53번 버스가 8번 운행되는 중에 온수리에서 14:25에 돌아오는 걸 타야될 것 같다. 

강화버스터미널 하자지점에서 2시방향 터미널을 질러 나가면 동락천이 있고 건너지점이 강화나들길 6코스 화남생가가는 길의 출발지점이다.

 

동락천변 뚝길. 징금다리. 조산평

동락천변뚝길로 450m 눈길을 걸어 시멘트로된 징금다리를 건넌다.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는 들판이다. 조산평이나 고식이들판으로 불리는 너른 논이다. 새들의 먹이 활동 모습도 간간히 보인다. 원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었으나 고려 대몽항쟁기에 간척이 이루어져 농토가 되었다. 강화에서 손꼽히는 비옥한 땅으로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한다. 

 

창1리 고식이마을

나들길은 창1리 고식이마을 도로 고식이길을 만나 우로 방향을 바꾼다. 창리감리교회를 보면서 300m 쯤에 강화정신요양병원의 입간판을 보고 그 길로 든다.

 

강화정싱요양원 들어가는 곳의 안내 입간판. 강화인삼스파랜드. 숲길입구.

담에 강화나들길을 안내하는 강화인삼스파랜드가 본래의 기능을 못하고 문을 굳게 닫고 있다. 사용하지 않으면 망가지기 쉽상인데 아까워라. 입구 앞을 통과하여 도감산 숲길로 들어간다.

 

설날 내린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인 도감산 숲길.
11:02 선원사지

강화 선원사(禪源寺)는 1,245년 고려시대 무신 최우가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가 강화로 도읍을 옮긴 뒤, 대몽항쟁을 위한 국민총화의 일환으로 선원사를 창건했다. 고종 임금이 1,246년(고종33년) 선원사에 행차했을 때도 최우가 접대를 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선원사는 당시 송광사와 함께 2대 사찰로 손꼽혔지만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고나서 차츰 쇠퇴했고, 결국 조선 초기 이후에 폐허화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원사는 현재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 즉 팔만대장경을 만든 장소의 하나로 꼽힌다. 판각 장소에 대한 명확한 자료가 아작까지 없어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전국 여러 장소에서 판각됐다는 설, 강화도와 남해로 나뉘어 판각됐다는 설, 남해에서만 판각됐다는 설 등이 존재한다. 조선왕조실록은 1,398년(태조7년)에 이 절에 있던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서울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조선 초기까지 대장경판을 선원사에 보관했다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유난히 따뜻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탁트인 선원사지 윗자락에서 음미하는 커피향이 참 좋다.

江華 禪源寺址를 1996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 한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 유물로 보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 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향토사가들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선원사터는 임금이 머물며 법회를 열기도 했던 '가궐(假闕)터'로 추정하기도 한다.

 

선원사

연꽃밭 뒤 만화스러운 작은 집을 지나 좌회전하고, 앞으로 세개의 길 중에 우로 꺽어지는 길로 진입한다. 명상수련을 통하여 몸과 마음이 밝고 건강해지도록 교육과 치유를 하는 일가명상센터의 간판이 붙은 마을 정자도 있고, 지산2리 남산대 주민복지시설을 지나간다.

 

'강화나들길을 허락해 주신 심안수선생님 고맙습니다'란 감사문 안내판이 있다. 연못과 정자가 개인 소유라면 잘 꾸며진 정원이다.
11:42 월하공원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서 이런 곳에 집을 짓고 자연과 벗삼으면 멋진 인생후막이 되겟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이름있는 주인장이 만든 월하쉼터다.

나들꾼들의 쉼터로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커피는 물론 쉬면서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 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몰라서 확인을 못해 봤다. 월하공원을 무료로 개방하고 공원을 가꾸고 지키는 정월하 선생은 설운도의 "마음이 울적해서", 이자연의 "여자는 눈물인가봐", 박영규의 "카렐레온", 장미화의 "애상" 등 수 많은 히트곡을  작사하신 대중음악계의 원로  원로 작가다. 강화도를 30년 전에 들어와 이곳에  자리잡고 나무를 가꾸면 사는 월하 선생은 나들꾼들에게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다. 

 

11:50 연리 보건진료소
두번째 숲길

문수산이 보이는 마을 길을 나와 벌판 도로에 몰아치는 바람이 엄청 세다. 나들길 리본이 90도로 꺾여 소리를 세차게 뿜는다. 바람부는 반대 방향으로 모자 쓴 고개가 돌아가고, 장갑낀 손도 시리다. 체감온도가 상당히 낮은 듯하다. 삼동암천의 조경교를 지나며 보니 얼음위에 조사들은 바람을 모른다.

 

년식에 따라 성장의 차이를 보여주는 조경용 나무들이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곳이 있고 예전에 뭔가 역할을 했을 법한 연식이 된 기와집을 끼고 길은 돈다.
12:37 영모사

마을에 제주고씨 여러 조상의 위패를 모신 ‘영모사’라는 사당이 있고, 평해황씨의 효부 정려문이 있다. 평해황씨는 고계인이라는 분의 아내였는데 시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여 효부로 표창을 받았다. 이 마을에서 [심도기행]의 저자 화남 고재형 선생이 태어났다.

 

12:40~13:13 영모사가 보이는 마을 정자. 점심식당이 되다.
물푸레나무는 고재형 생가 전, 상수리나무는 생가 후에 있다.
화남 고재형 생가 입구. 생가와 길을 두고 마주보는 집. 심도기행의 256번째 마지막 시 '두두촌' 동네에 있는 디딜방아.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1846-1916)은 과거에 급제는 하였지만,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은 선비였다. 그는 당시 강화군의 17개면 100여 마을을 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두루 다 돌아보고 그 감상을 256편의 시와 산문으로 남겼다. 자신이 사는 두두미마을을 시작으로 해서 노정(路程)의 순서대로 글을 썼으니 '심도기행(沁都記行)'이 바로 그것이다. 

 

두두미마을 장승, 심도기행 첫시 斗頭尾洞.

斗頭我步帶春風(두두아보대춘풍)  봄바람 맞으며 두두미를 걷노라니
一府山川兩眼中(일부산천양안중)  온 마을의 산과 내가 한 눈에 들어오네.
明月綠楊諸具榻(명월녹양제구탑)  밝은 달 푸른 버들 여러 구(具)씨 탁상에서
滿杯麯味使人雄(만배국미사인웅)  잔 가득한 술 맛이 힘을 내게 하는구나.

 

병오년(1906년) 봄에 선비는 길을 나섰다. 친구인 구(具)씨가 장도를 빌며 권하는 술을 몇 잔 마신 뒤에 불은면 두두미마을에서 선원면 쪽으로 길을 잡았다. 지금의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가 두두미마을이다.

 

두운2리 마을회관. 두운2리 장안마을회관. 마을 풍경.
미디어캠프에서 우로 방향 전환하여 나온 도로. 능촌입구 버스정류장 삼거리에서 좌회전 2분 후 숲길 입구.
세번째 숲길
천주교 오두리 공소. 오두보건진료소.
해안동로를 건너 해안도로농원으로 이어지는 나들길. 오두리에서 나오는 길. 강화나들길 2코스와 합류 지점. 염하강 뚝길

강화도의 갯벌은 펄 갯벌로서 펄의 비율이 90% 이상인 갯벌로, 해안의 경사가 완만하고 지형이 굴곡진 곳에 만들어진다. 썰물 때 넓게 드러나는 펄 갯벌은 대부분 강의 하구와 바다가 육지 쪽으로 파고든 만이 만나는 곳에 나타나며, 이런 곳에서는 자갈이나 모래로 이루어진 바닷가라도 조금만 바다 쪽으로 나가면 곧 진흙 같은 펄이 펼쳐져 있다.

강화도 남단의 갯벌은 세계 5대 갯벌 중의 하나로 전체면적은 약 353㎢에 달하며, 특히 “여차리-동막리-동검리”를 잇는 강화남단갯벌은 육지로부터 최대 약 6㎞, 면적은 약 90㎢로 강화갯벌 면적의 약 25%를 차지하며,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되었다. 이에 갯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통나무로 갯벌센터를 2005년에 설립, 갯벌과 생물, 갯벌의 중요성 등 재미있는 갯벌이야기와 더불어 농게의 힘자랑, 염생식물 관찰, 저어새 관찰 등이 가능하여 갯벌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14:40 광성보.

강화도의 5진 7보 53돈대 가운데 규모가 으뜸이다. 이곳은 염하강에서 물목이 가장 좁아 물살이 세므로 방어에 이롭다. 1658년(효종 9)에 설치됐었고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로저스가 지휘하는 미국 함대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광성보 성문과 나란히 하는 광성돈대[廣城墩臺].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 전시하고 있다.
광성보 성문 안해루 위의 용무늬. 염하강을 낀 외부의 모습.

광성보로 올라 갈 때는 버스정류장 안내판이나 버스 앱이나 모두 도착정보없슴으로 표시되다가 광성보, 광성돈대를 찍고 오는 사이 12분 후 도착으로 검색된다. 다행히 온수리에서 14:2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잘 맞췄다. 군내 53번 미니 버스는 강화버스터미널로 들어오는 내내 객이라고는 우리 둘이다. 완전히 전용이 되었다. 우리야 기분 좋게 잘 왔지만 은근히 버스의 수지 적자가 걱정스럽다.

오늘도 화남생가 가는 길 찬 바람이야 맞았다마는 걷는 재미는 그에 배가 된다. 뒷풀이는 검단 먹거리 타운에 매꼼한 쭈꾸미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