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가기

제주목관아, 관덕정

자어즐 2021. 6. 22. 21:43

시커먼 젊은 청년 셋이 한라산 가는 계획이 한 달 반 만에 성사가 되어 제주공항에서 뭉쳤다. 동이가 일이 있어 하루 먼저 출발했고 오는 날도 이른 시간 비행기여서 같이 타고 오진 못한다. 오후 네 시경에 제주공항에 착륙하고 이십 분 후에 비양도 삼성혈 등에 혼자 놀기를 한 동이와 만난다. 동이와 홍이는 사업상의 일로 간혹 제주를 찾으니까 이쪽 사정이 제법 밝다.

차액을 보전해 주겠으니 비행기 티켓을 이른 시간으로 바꿔 일찍오라고 했는데 하며 티켓 교환이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투정하는 동이와 버스정류장을 향한다. 이번 여행은 한라산 등산이 주여서 굳이 렌터카를 빌릴 이유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한다. 제주도에 와서 차를 렌트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GATE2 앞 버스정류소에서 동문시장으로 가는 버스 탄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는 여러 대가 있다. 어홉정류장에 시간도 이십 분 남짓이면 되니 멀지 않다.

오늘은 하루 남은 시간 관계상 동문시장에서 싱싱한 회에 술 한잔 하고 잠자러 가는 것이 전부여서 바쁠 것이 없다. 그래서 가는 길 한 정류장 전에 있는 관덕정과 제주목관아를 구경하기로 한다.

 

 

병사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제주의 대표적인 정자로 제주에서 가장오래된 건물인 관덕정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 안무사(安撫使) 신숙청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이 때 쓴 徐居正의 중수기에 의하면 관덕정은 "이 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武閱을 위한 것인 즉, 지금부터 제주의 사람은 날마다 이에 射習하되 과녁을 쏠 뿐만 아니라 騎射를 익힐 것이요, 기사 뿐만 아니라 戰陣法을 익힘으로써 적변(賊變)이 있을 때는 삼읍 백성들이 常山之勢로 수군, 육군, 보병, 기병이 각각 나와서 사력을 다하여 싸워 적군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처자를 구하고,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며, 이로써 나라의 간성이 되어 역사에 功名을 세운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그 세운 바를 펼쳐 보였다.

해방후 1948년 9월에 관덕정은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1952년도에는 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역정을 견디어 오다가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실내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작자 미상이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내용은 두보(杜甫)의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ㆍ상산사호(商山四皓)ㆍ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ㆍ대수렵도(大狩獵圖)ㆍ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ㆍ홍문연(鴻門宴)ㆍ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다.

 

제주목 관아 안내도
탐라포정사 진해루라 불린 관아의 관문 2층 누각의 외대문. 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 수령이라 함은 목사, 부사, 군감, 현감, 현령을 지칭한다.] 입구 오른편 매표소에서 1,500원/인(성인) 관람료를 받는다. 청소년은 800원이다.

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耽羅國시대부터 星主廳등 주요 官衙施設이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樣式으로 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文化層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연희각(延曦閣)·우련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遺構가 확인되고 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礎石·基壇石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의 문헌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考證과 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30만 특히, 제주역사의 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을 獻瓦해 준 제주시민의 혼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중대문. 연못. 낭쉐

낭쉐의 낭은 나무를 쉐는 소를 이르는 제주말이다. 과거탐라국 시대부터 입춘을 맞아 나무로 만든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밭갈이 하는 의례를 통해 한 해의 풍년과 도민의 안녕을 기원했던 탐라국입춘굿의 상징물이다.

 

귤림당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 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익는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心神)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創建)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1743년(英祖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改建)하였고, 1769년( 英祖 45)에 다시 중수(重修)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1842년(憲宗 8)에 다시 중수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공포는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면적은 9㎡(2.72평)이다. 

 

형틀 및 민속놀이 체험현장
목관아비석군

현재 이곳에는 과거 제주목관아 내에 소재했던 비석과 도내 각지에 산재해 있던 망실위기에 처한 비석들을 한 곳으로 모아 놓았다. '영상이공최응영세불망비', '사상양공헌수영세불망비', '행목사윤공계교민선정비', '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비', '사상한공응호거사대', '사상백공희수휼민선정비', '사상정공기원거사비', '사상조공희순영세불망비', '판관강공재의거사비', '목사양공헌수제폐비' 등이 있다. 

 

망경루와 1층 탐라순력도 체험관

망경루는 北斗星을 의지하여 임금님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그 恩德을 기리는 信地이며 중요한 제주목관아의 하나였다. 1556년(명종 11) 金秀文 牧使가 創建한 뒤 1668년(현종 9) 李 土寅 목사가 改建하였고 1806년(순조 6)에는 朴宗柱 목사가 重修하였다. 탐라순력도 체험관 1층 내부공간에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를 테마로 한 역사 체험공간을 조성,1700년대 조선시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방어유적 진상 등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면서 보여주는 여러상황들을 각각의 그래픽패널 및 영상물을 통하여 당시 제주의 생생한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해 볼 수 있다. 

 

제주목사가 행정사무를 보던 곳인 연희각

연희각은 목사가 執務하던 곳으로, 上衙의 東軒, 목사의 정아正衙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判官의 執務處인 二衙와 구분해 명명된 것이다. 李源祚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記文이 없어서 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懸板도 누가 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外臣이 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 6∼1640. 9) 의 詩가 附記되어 있고 또 이 때이때 목사의 겸직이었던 節制使가 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1884년(高宗 21)에 홍규(洪圭) 목사가 重修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36.63㎡(41.33坪)이다. 

 

군사업무를 맡아 보던 홍화각

홍화각은 예전에 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崔海山 按撫使가 창건한 뒤 1648년(仁祖 26)에 金汝水 牧使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肅宗 39)에 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防禦使가 重修하였고 1829년(純祖 29)에는 李行敎 방어사가 改建하였다. 홍화각이라 命名한 것은 왕의 어진 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記文 으로는 '高得宗記와 '金晉鎔重修記', '李源祚重修記' 등이 전한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日帝에 의해 강제로 훼철(毁撤)되었으며, 현재 高得宗이 쓴 '弘化閣'이란 扁額과 '弘化閣記'가 새겨진 懸板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되어 있다. 본 현판(懸板)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연회 장소로 사용된 우련당. 나중에 임금님 진상품을 바치는 곳으로 이용된 곳.

우련당은 1526년(中宗 21)에 李壽童 목사가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 이 침입하여 성 을 포위  하거나  火災가 발생하였을 때 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楊大樹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平地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楊大樹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되었다. 1694년(肅宗 20) 9월에는 李益泰 목사가 重建하였다. 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重修하고 못 가운데 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改名하여 공물을 封進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즉, '享儀室記'에 의하면, 書經 낙고편 에"貢物을 바치는 데는 儀式이 많은데, 의식에 바치는 물건의 精誠에 미치지 못하면 공물을 잘 바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을 享이라 하고 禮를 갖추는 것을 儀라 하니, 이에 그 집의 扁額을 고쳐서 享儀라 한다고 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1평)이다.

 

군인들이 근무하던 영주협당

영주협당은 원래 軍官들이 근무하던 官廳 이었다. 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軍官廳이 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人이 있으나 孝宗 초기에 李慶億 御使가 朝廷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군관들이 왕래할 때에는 항상 말이 支給되었으나 사사로이 말을 所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832년(純宗 32)에 韓應浩 牧使에 의해 重建되면서 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7.7㎡(32.58평)이다. 

 

 

제주목 관아를 나와 왼쪽 제주우체국을 지나서 400m 정도에 제주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동문시장이 있다. 동문시장에는 농축산물, 수산물, 건어물에 의류, 생활용품까지 없는 것 외에는 모두 판매하고 있지만 사시사철 만날 수 있는 제철 생선회가 가장 유명하다. 제주도에 오면 비행기 타기 전에 의례 들리서 제주의 맛을 보고, 또 오메기떡이나 제주 특산물을 사곤 하는데 오늘은 여기서 저녁을 해결하려고 먼저 들렀다. 제주동문수산시장 5번 게이트로 시장안에 들어선다. 

 

제주도 먹거리로 하면 귤, 흑돼지, 생선회가 떠오른다. 그중에 제철에 나는 생선회를 저렴하게 먹기에는 동문시장만한 곳도 없다. 입점한 횟집에는 미리 잡아서 포장해 놓고 가격표가 붙은 회들이 진열되어 있다. 가격이 정해져 있어 바가지 쓸 일은 없다. 갈려고 한 횟집 앞은 사람들이 많아서 옆 집으로 들어 왔다. 그기서 그기다.

도미는 통영이나 남해에 양식되는 것이 많고 전복은 제주산 양식이 있지만 완도 진도산이 많은데 제주도까지 와서 동네에서 먹는 것 처럼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주로 나오거나 양식되는 것으로 고른다. 칼치, 고등어 와 여기서 많이 양식되는 광어의 뱃살, 그리고 요즘 많이 잡히는 한치를 추가했다. 상차림 비용은 별도다. 내일 한라산 등산을 위해 딱 각일병이라고 외치던 말은 공염불이 되었다.

 

탐라문화광장 빨래터, 김만덕기념관

김만덕객주에서 막걸리 한모금은 해여한다는 동이의 주장에 동문시장 4번게이트에서 길 건너 제주항 방향으로 700여m 사부작사부작 걷는다. 김만덕기념관을 지나 서부두로 가는 갈림길을 조금 지난 지점에 있다. 김만덕객주는 200년 전 김만덕 객주의 모습을 약120평 규모의 초가 8동으로 재현한 현대판 객주터로, 객주 일부를 주막으로 운영하며 제주도 향토음식을 판매하고 있다.

 

제주 의녀반수 김만덕객주 재현 안내판에 김만덕 소개 글이 있다. 양인의 딸로 태어나 12세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생활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기녀가 되었다. 제주목사에게 탄원하여 양인으로 환원되었고, 객주를 차려 제주특산물과 육지 산물을 교환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해 많은 돈을 벌었다. 1794년 제주에 흉년이 들자 전 재산을 털어 사들인 곡식으로 빈민을 구휼하였고, 그 공으로 정조로부터 의녀반수의 벼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객주에 왔으니 비가 오지 않더라도 파전에 막걸리가 재격이지 않는가. 내일이 걱정스러워도 오늘은 오늘이라는 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