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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가족나들이

자어즐 2019. 1. 2. 22:09

해가 저문다. 하루 해도 저물고 이 년도 저문다. 효자손 찾는 주기가 빨라지는게 싫어 붙잡아 두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무리다.

돌아보면 빠른 시간이 무탈하게 지났음에 참으로 감사하고, 올해 기꺼이 새식구가 되어준 며느리가 이쁘고 고맙다. 아들내외 얼굴 보려고 손꼽는 김여사 년말년시 휴가로 들어오는 아들이 우리집에 더 많이 있지 않음에 내심 섭섭한 모양이다.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부작용이다. 처음이라 더하다.

손지메누리와 밥을 같이하자는 어머니가 동생네 식구들이랑 모두 소집해두었다. 손수 따뜻한 밥 한번 해서 먹이고픈 늙은 어메의 바람에 호응해서 29일로 날짜를 잡는다. 저녁에는 아들 내외랑 경주로 가서 하루밤 지내다 오려고 김여사가 숙소도 예약해둔다. 그런데 시간이 여의치 않는 동생이 있어 모이는 것을 하루로 연기하는 통에 순서를 바꾼다. 며칠 한파에 고생이지 싶어 경주행은 취소하려다가 '괜찮으니 갔다 오시죠'하는 며느리의 말에 집을 나선다. 추우면 다니지 말고 맛집과 찻집이나 찾아보려고 했는데 추위가 조금 누그러져 두가지 중 선택하라고 한다. 동해바다에 문무대왕릉,감은사지를 보고 감포쪽 예전에 노부부가하던 횟집을 가는 것이 하나고, 경주시내에 대릉원일원을 구경하고 한정식이나 쌈밥집이 또 하나다.

고속도로는 이름 그대로 밀림이 없다. 네시간 남짓의 차안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가끔 우리 부모님이 걱정스러워 그랬듯이 잘 살기를 바라는 충고가 날선 잔소리가 되기는 해도, 내면에 담긴 정은 깊어 간다.

 

1. 누구가 : 김여사와 아들,며느리

2. 언    제 : 2018년 12월 29일(토)

3. 어디로 : 경주대릉원일원, 동궁과 월지

4. 얼마나 :

 

▼ 이동경로 : 대릉원 - 첨성대 - 경주향교 - 계림 - 이풍녀구로쌈밥 - 동궁과 월지

 

▼ 대릉원. 많이 지나는 다녀도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2,000원/대인  

 

▼ 언제 와 본 건지 아득하지만 김여사랑 왔었다. 근데 김여사 왈 난 기억에 없는데 혹시 다른 사람이랑 왔던 거 아니냐고 하길래 앨범뒤적거린다. 김여사와 82년에 온 흔적이 찾는다. 야리야리한 몸에 고왔던 얼굴이다.

 

신라 고분들이 모여 있는 대릉원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약 12만 6,500㎡의 너른 평지 위에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30기의 고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무덤들 속에는 무덤 주인과 함께 수많은 껴묻거리[副葬品]가 같이 묻혀 있다. 

대릉원은 신라의 왕권강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인 4세기에서 6세기 초까지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천마도의 '천마총'과 대릉원이라 이름 붙이게 된 댓잎군사의 전설 이야기가 재미있는 '미추왕릉', 경주에서 가장 큰 무덤이면서 금관이 발굴된 '황남대총' 등이 모여 있다.

 

황남대총. 경주의 신라무덤들을 능, 총, 묘로 구분하는데, ‘미추왕릉’처럼 어느 왕의 무덤 인지 확실 할 때는 왕의 이름을 붙여 '능'이라 하고 '총'은 천마총과 같이 발굴 후, 출토된 유물의 보존 가치가 높지만 누구의 무덤인지 모를 때, '묘'는 '김유신묘'처럼 귀족 이하 일반인들의 무덤에 붙여진 이름이다. 

 

1970년대 정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하여 교육 및 연구 자료로 삼고자 했으나 그와 같은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없어, 그보다 작고 가까이에 있는 155호분을 발굴하여 경험을 쌓으려 했던 것이 지금의 천마총이다.

 

天馬塚. 대릉원의 고분군 중 유일하게 공개하고 있는 155호 고분 천마총은, 직경 약 47m, 밑둘레 157m, 높이 12.7m로 비교적 큰 무덤이고 왕이나 그에 준하는 신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천마총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으로 추정되는데 1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실제 유물들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단다.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형태인 천마총은 목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나무 덧널을 짠 후 주위와 윗부분을 돌로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지고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들어 마무리 한 돌과 덧널을 사용해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발굴 당시 봉분은 마치 화산분화구처럼 움푹 들어 가 있어서 봉분에 흙을 채워 봉긋하게 복원해 무덤형태를 알 수 있게 복원한 모습의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전시관 안의 썩은 목관은 그대로 둔 채 덧널만을 복원해 목관내부를 볼 수 있게 공개하고 있다.

 

▼ 1973년 발굴 과정에서 부장품 가운데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말을 탄 사람의 옷에 흙이 튀지 않도록 가죽 같은 것을 말의 안장 양쪽에 늘어뜨려 놓은 기구)가 출토되어 ‘천마총(天馬塚)’이 되었다,

 

황남대총

황남대총은 대릉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인데, 동서 길이가 80m, 남북 길이가 120m, 높이가 23m로, 신라 고분 가운데 가장 크다. 무덤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 서로 붙어 있는 쌍봉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그 모습이 꼭 표주박 같다고 하여, 표형분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두 개의 무덤이 하나로 만들어진 무덤을 부부 무덤으로 추축하고 있다. 무덤을 붙여 놓은 이유는 황남대총도 천마총과 같이 돌무지 덧널무덤이기 때문에 먼저 죽은 사람의 무덤을 다시 파낼 수 없어, 바로 옆에 무덤을 이어 만들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 당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북쪽 무덤에서는 금관을 비롯한‘부인대’라는 여자 허리띠와 목걸이, 팔찌, 곡옥 등의 장신구가 나왔고, 남쪽 무덤에서는 남자의 뼈와 금동관 과 무기 위주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남쪽 무덤에서 남자의 뼈와 함께, 15세 정도의 여자의 뼈 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아 무덤의 주인과 함께 여자가 순장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라에는 지증왕 이후 순장을 금지했다는 기록과 위의 사실을 통해 신라의 순장풍습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발굴 작업은 1973년 7월부터 1975년 10월까지 연인원 3만 2,800명이 동원되었는데, 북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장신구, 무기, 토기류가 3만 5,000여 점, 남분에서는 무기가 대부분인 2만 2,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으며 서역을 통해 신라에 수입된 것으로 여겨지는 유리 제품도 출토되었다.

 

미추왕릉. 대릉원은 '미추왕을 대릉에서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래된 것이며,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竹現陵)' 또는 ‘죽능'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능 앞의 대나무 숲이 그 설화를 떠오르게 한다.

 

▼ 담장으로 둘러진 큰 무덤의 주인은 바로 신라 13대 왕을 지냈던 미추왕으로 신라의 첫 번째 김씨 왕이다. 재위 기간 동안, 백제의 침입을 막아 내고 농업을 장려하는 등 국력 신장에 힘써, 죽은 후에도 신라인들에게 성군으로 사랑받은 왕이다.

 

둥글게 흙을 쌓은 형태로 높이 12.4m, 지름 56.7m이다.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하며, 내부구조는 돌무지덧널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고 능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이 머무는 자리인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 대릉원을 나와서 주차장을 지나 길건너로 월성지구로 넘어간다.

 

▼ 입구에 비단벌레전동차 매표소를 돌아 첨성대를 찾아간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비단벌레 모형.

 

▼ 첨성대 국보 제31호. 높이 약 9.5m로 생각보다는 크다.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주장,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과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건축물 등 여러 주장들이 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는 첨성대는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쌓은 돌이 모두 362개로, 음력 1년의 날 수와 같고, 12개의 기단은 1년의 12달을 의미해서 신라인들에게 달력

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한다.

 

계림

김 씨 왕조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깃든 숲, 계림은 원래 성스러운 숲이란 뜻의 ‘시림’으로 불렸는데, 닭과 관련된 김알지의 탄생설화 때문에 닭이 우는 숲이란 뜻의 계림으로 불리게 되었다.

탈해왕 9년(65년), 왕은 한밤중에 금성 서쪽, 시림이라는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를 보낸다. 조그마한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으며,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아이는 갈수록 총명함을 더했고, 이름은‘알지, 금궤 속에서 나왔다 하여 김이라 성씨를 붙였다. 탈해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왕위를 받지 않았으며, 김알지의 육대손에 와서 김씨가 왕이 된다.

신라인들에게 닭은 어둠을 물리치고 아침을 알리는 동물로 매우 신성한 존재로 여겼으며, 황금상자는 권력을 상징하는데 토템과 금 숭배 사상을 짐작케 한다.

 

▼ 수령 약 1,300년으로 추정되는 계립 입구의 회화나무.

 

▼ 경주향교. 들어서자 우물이 손을 맞는다. 

 

▼ 향교 한쪽 끝에는 사로가 2개인 활터가 있다. 인이라고하는 것은 마치 활쏘기와 같다...

 

경주향교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를 제사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이다. 이 자리는 원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진 국학이 있던 곳이다. 경주 향교가 처음 지어진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조선 성종 23년(1492)에 서울의 성균관을 본 떠 고쳐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탄 뒤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과 전사청을 다시 지었다. 이어서 선조 37년(1604)에 동무와 서무를 짓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더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은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구조를 보이고 있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곳이다. 강당인 명륜당과 동재·서재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시설이다. 대성전은 앞이 3칸이고 옆이 3칸인 맞배지붕으로 위엄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5칸에 옆면 3칸인 겹처마 맞배집이다.

 

▼ 대성전

 

경상북도 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나주향교와 함께 향교 건물 배치의 모범을 보이고 있단다.

 

▼ 교촌한옥마을은 생략하고 향교를 나와 계림으로 나온는데 눈길이 가는 것이 내물왕릉앞 소나무숲이다.

 

▼ 계림비각.1803년(순조 3)에 세운 6각형 비각으로, 안에는 계림의 내력과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설화를 새긴 '경주김알지탄생기록비'가 놓여 있다.

 

▼ 돌아 나오는 길에 옷을 갈아 입은 첨성대가 색시하다고 해야하나...

 

▼ 이풍녀구로쌈밥이 당첨이다.  

 

▼ 쌈밥으로 주문하니 한상 가득 상다리가 휘어질라. 전라도 한정식이 이러할까. 반찬 하나하나가 맛이 괜찮다. 가성비도 좋다.

 

▼ 데친 쌈에 칼치속젖,멸치젖을 올려 배터지게 먹으니 혀가 호강을 하고 식당을 장식하고 있는 닥종이 인형과 박제들을 구경하느라 눈이 즐겁다. 

 

경주 동궁과 월지[舊 임해전지, 안압지]

 

문무왕 674년, 삼국을 통일하고 국력이 강해지면서 궁궐도 커지게 되어 신라 왕궁의 별궁이며,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안압지 남쪽에 신라 궁인 월성이 있어 이곳까지 자연스럽게 커진 것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안압지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궁 안의 못'으로만 기록되었다. 1980년대‘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굴되며, 본래 이름은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월지'라고 불렀다.

이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곳이 폐허가 되자. 시인묵객들이 연못을 보며‘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는 쓸쓸한 시 구절을 읊조리고 그 때부터 기러기 '안'자와 오리 '압'자를 써서 ‘안압지’로 불리게 되었다.

안압지를 볼 때 주목할 만한 것은, 동서 길이 200m, 남북 길이 180m,총 둘레 1000m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느 곳에서 보아도 연못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궁과 월지 입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적힌 안내판 하나가 있아. 1975년, 안압지를 발굴하던 중, 연못 바닥의 진흙 속에서 주령구라는 나무로 만든 주사위가 발견되었는데, 아이 주먹크기 정도의 14면체 주사위로 참나무로 만들어진 이 주사위 위에는 각 면마다 재미난 벌칙들이 새겨져 있었다. 노래 없이 춤추기 벌칙인 금성작무[禁聲作舞],여러 사람 코 때리기 벌칙 중인타비[衆人打鼻], 술 석잔을 한 번에 마시는 삼잔일거[三盞一去],등 각 14면에는 다양한 벌칙이 적혀 있는데 특히 신라인들의 음주 습관과 풍류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 김여사 컨디션 난조로 차지킴이를 하고, 한번은 구경하려고 맘먹었던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어서 셋이서 둘러보러 든다.

 

안압지에는 현재 연못과 세 개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지만, 발굴 당시 이곳에서, 무려 스물여섯 곳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단다.

 

▼ 연못의 물이 얼어서 선명한 반영이 아닌 게 아쉽다.

 

▼ 이게 뭔 열매냐. 모과같은데.

 

▼ 콘도를 체크아웃하고 어머니집으로 가기전에 보문호수를 맛보기한다. 한바퀴 돌기에는 시간이 여의치 않다.

 

시집의 시자가 싫어서 시금치도 먹지 않는다는 우스게소리가 생각난다. 시부모가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친정 부모같이 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격식에서 자유롭지 못한 초보 며느리는 어리광과 불평을 할 수 있는 친정 부모와는 천양지차의 간격에 말 못할 고충엄청나지 싶다.

 

생각의 차이나 불평이 친정 부모에게는 모두 포용되고 받아들여지지만 시어미에게는 당돌하고 버릇없는 며느리가 되는 생각차이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시간만이 약이 된다. 예전에 시집살이를 잠시한 적있는 김여사가 아버지 어머니나 식구들이 편하게 줄려고 노력하는데도 긍정의 대답만해야하고 벙어리가 되어야하는 어려움에다 스스로가 긴장하는 생활의 연속이라 받은 스트레스 땜에 셋방살이라도 좋으니 나가서 살아봤으면 하고 하소연 했을까. 지금보면 역시 시간이 약이었다. 

 

딸이 없어 며느리 손잡고 맛있는 것 먹으로도 가고 쇼핑도 하며 재미나게 지내고픈 김여사의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초보 며느리는 부담스러울 수 있으니 빨리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다.

 

나는 아들이 가정을 꾸리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범위의 것은 필요시 그냥 해주고 기대는 하지 말기로. 내가 이만큼 해 줬는데 하는 반대급부로 요구되는 기대가 크질수록 갈등도 비례하는 것을 봐 왔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애들이 재미있게 사는 모습만 멀리서 지켜보자는 보편적으로 가지는 생각을 한다. 

김여사 우리가 저만한 나이일 때 우리 부모님도 불안불안하게 지켜 보셨겠지만 어린 나이에 아이 유치원 보내면서 우리 영역을 만들어 나갔잖소. 그러니 이제 저네들 사는 것은 저들의 몫이니 털어버리고 내려 놓읍시다. 잘 사니 못 사니 해봐야 간섭밖에 더 되겠소. 뭔가를 더 해주려는 마음보다는 해 주지 않는 자제력도 필요한 것 같소. 단지 우리는 그냥 우산이 됩시다.

 

친구 하나가 퇴근길에 며느리 좋아하는 딸기 한 팩을 아들네 아파트 경비실에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며 며느리에게 '경비실에 딸기 놓고 왔다'고 연락하니 며느리가 '아버님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며느리예요' 하더라고 자랑하길래 배가 살 아플려고 하더라.ㅎ 배가 고픈 것은 참는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우리나라 사람들의 고질병.

 

멀리 있어 그런 현상은 없지만 둘이 오손도손 재미있게 살면 그것으로 된거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보고 웃으면서 오래토록 아끼고 사랑하거라. 나중에야 두사람이 가장큰 의지고 버팀목임을 알게 된단다.

 

적성에 맞고 일이 좋다고 하니 다행이다만 기왕하는 직장생활 믿을 맨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 경험상 책임감이 가장 큰 사회생활의 덕목이더라. 솔선수범도 책임감에서 나오고 신뢰 또한 첵임감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변명은 공공의 적이니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도 그것에서 나온다. 괜한 잔소리가 되네... 

 

하지만 자랑스런 아들, 멋진 남편, 믿음직한 동료 직원이 되도록 높이 뛰어 올라라. 이건 무진장 어려운 주문이고 희망사항이다.

 

▼ 어느새 6.5km 호반둘레길 한바퀴 눈으로 돈다.

 

우리 어메가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들,며느리,딸,사위, 손자,손녀 손자며느리까지 한사람 빼고 전원 집합하니 춤이라도 출 기세다. 손자며느리 먹이겠다고 손수 만드신 쇠고기를 찢어 고명으로 덤뿍 얹은 당면국과 등갈비찜...을 맛있게 먹어주니 조아라 한다. 벌써 지난 축하곡을 뒤로하고 올라오는 길에 또 다른 늙은 어메에게 인사드린다. 두 어메 모두  '언제 다시 이렇게 만날 수 있을꼬' 하시는데 괜히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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