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들 하루밤을 지낸 숙소에서 시간을 다 채워 나오는 게 거의 관례다. 아침은 챙겨 먹고 전날 한 게임의 연장전을 하다 보면 거의 11시가 되어야 숙소를 나선다. 동참하지 않는 두엇은 주위를 산책하며 시간을 맞춘다.
오늘은 밥 먹고 엊저녁 어지러놓은 잔해들을 치우기 바쁘게 바로 짐을 꾸린다. 우리가 기대하던 생각의 숙소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고, 한갑자 돌더니 철이 들이 들었나 싶기도 하다. 한옥마을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려는 순수한 의도인가? 한둘 빼고는 모두가 한번쯤은 지나갔을 한옥마을일 텐데...
휴일에는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서 추차하기가 만만찮다. 이미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가려는 차들의 행렬은 길게 늘어져 있지만 우리는 운좋게도 관계자가 유도하는 다른 주차공간으로 수월하게 차를 댄다.
전주의 가 볼만한 곳으로 첫번째 꼽히는 것이 한옥마을이다. 전망대에서 600여채가 넘는 한옥의 모습은 보노라면 가슴 뿌듯한 뭔가가 있다. 근데 막상 내려가서 걸어보면 한옥이 주는 점잖고 고상하고 귀티나는 그런 이미지는 많이 퇴색된 느낌을 받는다. 골목 구석구석 한옥으로 치장한 한복대여나 먹거리로 시쓸벅적한 상점들이 대부분이다. 먹는 것 노는 것이 우선이 되어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볼 거리가 풍부하고, 쉽게 코스를 그릴 수 있는 안내가 아쉽다. 부여도 그랬지만 백제의 문화유산을 관광객에게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무엇이 없을까? 한번쯤은 와 볼만한 곳이 아니라 다시 오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는데...내 생각은 그렇고 젊은 연인들은 한복 대여해 입고 인생사진으로 추억을 만드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자만벽화마을이나 전주향교, 남부시장 구경까지는 힘들 듯히고 이곳을 더 많이 아는 친구 따라 오목대, 경기전, 전동성당을 보고 한옥마을 골목을 구경이나 하자. 전주비빔밥도 여기니까 먹어봐야지 비빔밥 앞에는 전주가 붙으니까.
1. 누구가 : 패로우즈 친구(달,수영,영화,월동,재정,종철,철홍,현기)와 함께
2. 언 제 : 2018년 11월 04일(일)
3. 어디로 : 전주 한옥마을, 전동성당, 경기전
4. 얼마나 :
전주한옥마을은 완산구 풍남동과 교동 일원에 위치해 있다. 한옥 625동과 일반건축물 174동으로 이뤄져 있다.
1970년 전후까지만 해도 한옥마을은 부촌이었다. '문화연필', '백양메리야쓰' 같은 유명기업이 자리했다. 산업화시기를 거치면서 기업들은 공단으로 이전하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이후 풍남동·교동 일대는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된다. 개발행위가 제한되자 한옥마을은 빈민촌으로 전락했다. 주민반발이 높아졌고 시는 결국 한옥지구를 해제하게 된다.
한옥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우리나라가 '2002년 한일월드컵'을 유치하면서부터다. 전주는 당시 개최도시 중 하나로 선정됐다. 시는 이를 계기로 전 세계에 전통문화도시 전주의 위상을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워'전통문화 특별구역'을 조성하게 된다. 이 전통문화특구를 '전주한옥마을'로 명명했다.
부단한 노력 끝에 2010년부터 한옥마을은 전성기를 맞고 있다.
▼ 한옥마을을 구경하는 여러가지 코스가 있으니 초행자는 움직일 길을 그려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무턱대고 가면 우왕좌왕한다.
● 한옥마을 단숨에 보는 코스(1~2시간)①전동성당 → ②경기전 → ③교동미술관 → ④최명희문학관 → ⑤부채문화관 → ⑥한옥마을역사관 → ⑦은행로 → ⑧태조로 사거리 → ⑨오목대
● 한옥마을 및 주변연계코스 (1박2일)①전주객사 → ②전라감영지(부영지) → ③풍남문 → ④남부시장(청년몰) → ⑤전동성당 → ⑥경기전 → ⑦교동미술관 → ⑧최명희문학관 → ⑨부채문화관 → ⑩600년 된 은행나무 → ⑪동락원 → ⑫전주김치문화관(구 한옥생활체험관) → ⑬전통술박물관 → ⑭전주전통한지원 → ⑮오목대 → ⑯당산나무 → ⑰강암서예관 → ⑱전주천 둔치 산책길 → ⑲한벽루 → ⑳자연생태관 → ㉑치명자산성지
▼ 전주시 대표브랜드 '한바탕 전주'는 다양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생겨난 전주의 역동성을 상징하며 이를 통해 전 세계에 전주의 문화자산을 퍼트리겠다는 강한 의지 표현이란다. 도시 슬로건에 '비빈다'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그리고 다양한 문화 간의 공존을 표현했단다. 비빔밥을 떠올리게 하는 재미있는 표현이다.
▼ 태조로 동쪽 입구
▼ 이길을 따라 넘어가면 오목대와 이목대로 건너가는 다리랑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 샛길로 가도 오목대로 오른다.
▼ 오목대[梧木臺]. 고려 우왕때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이성계가 개선길에 머물러 잔치를 벌였던 곳으로, 이후조선 건국 이후 돌아와 오목대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 조선왕조의 몰락을 거부하고 전통 왕조의 재건을 강건히 하고자 했던 고종황제가 1900년 오목대에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와 비각을 세웠다. 태조가 여기 머문 장소라는 얘기.
▼ 여기에서 이성계는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읊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大風起兮雲飛揚(대풍기혜운비양) / 대풍(大風)이 일어나서 구름을 날렸도다.
한(漢) 고조(高祖)의 군사가 가는 곳마다 진(秦)나라의 성(城)이 무너지는 것이 마치 큰 바람에 구름이 흩어지는 듯함을 비유한 것.
威加海內兮歸故鄕(위가해내혜귀고향) / 해내(海內)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수사방) / 이에 용맹한 군사를 얻어서 사방(四方)을 지키리라.
바람은 자신을 비유한 것이고 구름은 난세를 비유한 것이다. 이미 난리를 평정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므로 어진 인재와 함께 지킬 것을 생각함을 말한 것이다.
▼ 한옥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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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고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경기전은 선조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광해군6년(1614년) 중건되었다.
▼ 경기전 정문. 입장료 어른 3,000원/인
▼ 경기전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신성함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칠을 한 홍살문, 외신문, 내신문 그리고 어진을 모신 정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실 사당임을 감안할 때 신문(神門)이라고 호칭되며 홍살물 안쪽 내·외신문의 세 문을 통과할 땐 '동입서출', 다시 말해 동쪽(오른쪽)으로 들어가 서쪽(왼쪽)으로 나와야 한다. 가운데는 태조의 혼령이 드나드는 '신도'이기 때문이다.
▼ 정전 마당에 철 가마솥 같이 생긴 것이 양쪽에 3개씩 있는 것은 화재 발생시 초기 진압용으로 물을 채워 둔 것이란다.
▼ 경기전의 대표적인 수목 와룡매[100년? 된 매화나무]가 전주사고 정원에 있다. 마치 용이 비상하는 것처럼 하늘로 오르다가 다시 땅을 치고 솟구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용매라고 불린다.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 9)부터 1413년(태종 13)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세종 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 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 사고에 봉안했다 한다. 그러나 2부는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 27)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 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하였는데 이것이 전주사고의 시초다.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 전체가 화를 당하자 실록을 정족산, 태백산, 묘향산(후에 적상산으로 이동), 오대산의 산간지역에 4개 지방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해 왔다고 한다.
임진왜란에 전주사고도 불에 탔지만 손홍록과 안의의 충절로 실록을 피신 시켜 지켜낼 수 있었단다.
▼ 조경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전주 이씨의 시조이자 태조 이성계의 선조인 이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
▼ 완의 초상화 어진박물관.
▼ 경기전 서문을 나와 따라가는 담벼락 끝에는 전동성당이 점점 클로즈업 된다.
▼ 종로회관으로 밥 먹으러 들어갔다가 한참 기다려야 된다고 해서 그냥 나온다. 비빔밤 비비면 별반 차이 없는데 오래 기다려서 먹을 필요까지야 있나 해서...
▼ 태로로 서쪽 입구. 왼쪽에 있는 풍남정에서 기어이 비빔밥을 먹는다. 전주비빔밥으로 향토전통음식업소로 지정 받은 곳이다.
▼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전동성당.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내애게로 오너라 내 편히 쉬게 하리라.
▼ 전동성당은 1791년 신해박해 때 윤지충(바오로)과 관련된 권상연(야고보)이 참수형을 당한 한국 최초의 천주교 순교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된 전교의 발상지이다. 두 성인이 순교한지 1백년이 지난 1891년 봄, 순교터에 본당 터전을 마련했다. 초대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순교 1백주년을 기념해 1908년 건축을 시작,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1914년 완공됐다.
▼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통감부는 전주에 새 길을 내기 위해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보두네 신부가 그 성벽의 돌들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 중앙에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과 좌우 작은 종탑의 조화와 벽체에 난 아치문의 곡선미는 시선을 자꾸 빼앗는다.
▼ 전동성당은 회색과 붉은색 벽돌을 이용해,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해 지어진 건물로 초기 성당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미를 가진 건물로 손꼽힌다.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과 서양문화의 조합이 묘하게 어울린다.
▼ 잇개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 탓에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약속,전우치......
▼ 피에타상.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모사한 작품.숨을 거둔 예수를 안고 비통에 잠긴 성모의 얼굴에 어떤 것 보다 더한
슬픔이 베어 있다.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이 피에타이다.
▼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 서서 내부를 엿본다.
▼ 성당의 내부도 아치형의 연속이다. 원과 반원 반복되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내부의 분위기를 성스럽게 한다.
▼ 명동성당은 아버지 같고 전동성당은 어머니 같다고 한다. 제대 앞에서 빛의 은총을 받아본 사람은 어머니의 품 같은 포근함을 느낀다고 하는데 제대로 가는 통로에 금줄이 쳐져있다. 눈으로 보는 걸로 만족하고 성당을 나온다.
▼ 줄지은 천막의 경지전 입구쪽 끝칸에 자리한 짚풀공예 작품이 내 눈길을 끈다.
▼ 줄을 서 있는 기다리는 이집 수제만두집이란다. 얼마나 맛이 있어 줄을 서는 지 모를 일. 맛보다는 군중신리가 더 클 수도 있다. 이곳에 항상 분비는 간식꺼리 집이 몇군데가 있단다. 임실치즈구이, 꼬치......
▼ 쵸코파이 하나들고 나주에는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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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전통술박물관은 집집마다 술을 빚던 우리의 가양주(家釀酒) 문화를 테마로 하여 2002년 전주한옥마을에 개관하여 우리 전통 술에 관련된 전시와 체험, 교육, 연구사업 등을 통해 가양주의 맥을 이어나가는 대표적인 전문 전통술박물관이다
▼ 전통술박물관 ‘계영원’에서는 전주이강주, 송화오곡주, 송화백일주, 진도홍주, 복분자주, 정읍죽력고 등 다양한 전통술들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 전주소리문화관의 오정숙 기념관. 이곳은 판소리를 중심으로 전통문화 공연예술 인프라를 구축하고 보존과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곳이다. 판소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있다. 자그마한 양반이 울리는 판소리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 소리문화관의 놀이 마당.
한옥마을의 고택에서 한옥이 주는 은은한 맛을 느껴보는 하룻밤의 호사도 괜찮았을 건데 아쉽기는 하다. 오늘 한옥마을 짧은시간 돌아 보며 2018년 하반기 또 하나의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전동성당에서 학창시절 교정에 있던 성당의 분위기를 기억해 내어 그시절을 더듬어 보기도 하고 골목길 걸으며 격의 없는 티격태격에 서로의 정을 느껴보기도 한다. 사십년을 훌쩍 넘게 이어온 벗들, 일년에 두어번 만나지만 그 만남이 참 좋다.
내년 일월에 집사람들 찬스를 써서 북해도에서 만나날을 기대하자. 그 때쯤 사위 보는 친구 축하도 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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