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같은 나오바리에 살고 있는 우리 네부부는 인천공항까지 공항벤을 이용하기로 하고 웃돈을 조금 더 주고 각 집으로 픽업을 해서 공항으로 편히 왔다. 인천에서 18:50분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타고 4시간 40여분 을 날아 베트남 다낭으로 들어왔다. 여행을 가는 기분에다가 영화 두편을 더하니 그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베트남은 한국인 가이드가 공항 출입이 불가하여 현지인 가이드가 피켓을 들고 우리를 맞는다. 70중반의 노부부와 5명의 여성팀 그리고 우리 네부부해서 15명이 이번여행에 동반자들이다.
다낭 골든베이 호텔에서 낯선 하루를 맞는다. 늦게 잠이 들어도 습관대로 깨어난 잠은 이른 시간을 가리킨다. 한국과는 두시간의 시차가 있다. 출발전에 검색한 다낭의 일기는 출국하는 순간까지 비오는 날씨가 예보되어 있다.
오늘은 일정표에 옛 베트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 역활을 했던 후예투어가 잡혀져 있다. 호텔에서 약110km인데 두시간반 소요된단다.
후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유적지 관광이 가능한 도시이며 그래서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후에는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와 남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며 짱띠엔 다리와 푸쑤언 다리가 양쪽을 잇는다.
베트남전쟁 당시, 후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경계에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고 매우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다. 서로가 이 지역을 탈환하면서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파괴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현장이기도 하다. 1990년대 들어 지방 정부가 후에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해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이동경로 : 다낭 - 후에성 - (배) - 티엔무사원 - 카이딘황제릉 - 다낭
▼ 호텔에서 내려다 보이는 투언푸억다리. 비가 계속 와서 수위가 거의 도로랑 같을 정도로 높아져 있다. 남오비치해변이 멀리 보이는 해변에 있다.
▼ 다낭역, 다낭공항쪽 다낭시.
▼ 이 강의 이름도 한강이다. 우리 한강 같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 중에 다리 높이가 제일 높아서 세상을 하직하는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자살다리란 좋지 않은 별명을 가지고 있단다. 뒤쪽에 있는 산중에 바나힐도 있다.
▼ 다낭만.
▼ 고기잡는 모습이 특이해서 한참을 구경해 보는데 잡히는지 궁금하다.
▼ 바구니에 잡은 고기가 들은 듯 작은 판넬로 상륙중.
아침을 먹으러 7시 반 쯤에 호텔 3층의 식당으로 들어 간다. 앉을 자리가 없이 복작대는 광경에 입이 벌어진다. 왠간하면 아침시간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처음이다. 그리 작지도 않는 공간에 거의가 우리 말을 한다. 여기가 서울의 변두리 호텔인 듯하다.
9시가 넘어가는 시간에 다낭에서 후에로 출발한다.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를 원망하며 두시간 반이 걸려 후에에 도착한다.
오토바이들의 천국답게 거리를 활보하는 광경이 간혹은 장관이고 새롭다. 버스도 속도를 내는 일이 없다. 그래서 인지 교통질서는 엉망인데도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사고가 있어도 큰 사고는 드물고 간단한 접촉 정도라고.
길가의 집들이 고만고만해서 물어보니 대부분이 국가에서 지급하는 크기(5m×20m)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런 도시와 시골은 약간의 차이는 있다고 한다. 쌀농사가 삼모작이 되니 먹거리도 풍족해서 베트남 국민들은 주식에 어려움이 없다. 그래서 거지가 없다.
가면서 버스도 구경하지 못한다. 베트남에서는 사회주의의 특성상 주거지역을 거의 벗어날 일이 없을 뿐더러 어디를 갈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고 까다로와 수요가 없다. 장거리 2층 침대버스만 가뭄에 콩나듯 한다.
후에 황성[Hoàng thành Huế]
베트남의 후에성은 1802년부터 1945년까지 약 143년간 응우엔 왕조의 황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킬로미터, 높이 5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래 100여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베트남 전생시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태화전등 일부만 남아 있다. 봉건주의 유물로 방치되었다가 지금은 정책의 변화로 복원 및 보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 주차장에서 성의 남문 근처까지는 전동카로 해자를 건너 이동한다. 해자는 폭이 30m, 깊이가 4m란다.
▼ 후에성은 전문 가이드들이 안내한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우리나라에 2년 정도 채류한 것치고는 한국말이 유창하고 유머가 상당하다. 속담이나 4자성어도 적당히 섞어 쓸줄 아는 재미있는 친구다. 박항서감독이 이끄는 베트남대표팀의 축구 얘기부터 시작한다. 모래 스즈키컵의 결승에서 우승하도록 응원해달라고 한다.
▼ 국기계양대 께이다이. 베트남 국기 황성홍기가 걸려있는 이 계양대은 전체 놀이가 38.4m로 베트남에서 가장 높은 깃발탑이다.
▼ 응오문[오문]. 정오의 문이란 뜻으로 12:00가 되면 태양이 성문의 꼭대기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황색으로 된 가운데 문은 황제가 다니던 문이고 그 양 옆은 문무대신이 다니던 문이다. 응우엔왕조 2대황제 민망왕 재임시절에 만든 17m 높이의 석루.
▼ 거의 대칭으로 되어 잇는 성의 응오문을 들러서면 좌우의 연못에 잉어들이 발자국 소리를 반긴다.
▼ 태화전 아래 양쪽을 지키고 있는 사자상인지 해태상인지 경복궁의 것과는 모양이 다르다.
▼ 태화전[디엔타이호아]. 역대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던 장소이고 평소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접견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 경복궁 근정전 앞의 품계석같이 이곳에도 품계석이 있다.
▼ 황제의 건물임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지 태화전 지붕에 용이 몇마리나 올라가 있다.
▼ 한자권의 문화가 유입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식.
▼ 태화전 내부에는 권위를 자랑하듯 높이 올려진 왕좌가 한가운데 농여져 있다.
▼ 태화전 뒷쪽 지붕은 색상과 소재를 달리하고 있다.
▼ 태화전의 뒷뜰에 대형 청동대야가 놓여 있다. 응우엔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 종묘의 출입문인 묘문.
▼ 현림각의 뒷모습. 높이 13m의 3층 누각.
▼ 응우옌 왕조 13명의 황제중 3명의 위폐가 없다. 기간이 짧아 실적이 없거나 나라를 망친 왕이다. 5대(4일),6대(4개월),프랑스의 허수아비 노릇을한 마지막 황제의 것이 없다.
▼ 세조묘[떼또미에우]. 자릉황제 사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822년 지은 종묘이다. 지금은 자릉황제 뿐만아니라 역대 황제 9명을 모시고 있다.
▼ 세조묘와 마주보는 현림각. 현림각 앞에는 9개의 솥이 걸려 있다. 각각의 쇠솥은 응우옌 왕조의 황제를 상징한다. 각각의 크기과 문양이 다르고 가장 큰것이 자릉황제를 상싱한다.
▼ 앞마당에 제단이 마련되어 있어 향을 올리기도 한다. 이곳에서 주기적으로 거행되는 태묘제례약은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 용나무.
▼ 2대 민망왕이 가장 강력한 왕이었고 부인이 수백명에 자식이 140명이나 되어 베트남 인구 증가에 큰 기여를 했다고 우스개소리를 더해서 재미있게 마무리하는 후에성 가이드. 믿거나 말거나.
▼ 시간에 쫓길 것도 없는데 페키지여서 인지 대충 훝어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쉽다. 전각을 이어주는 회랑과 태평루[타이빈러우], 장생궁[꿍쯔엉상],연수궁... 구경할 곳도 많은데도 그냥 생략이다.
흐엉 강(perfume river, 향강)
베트남 중부의 투아티엔후에 성에 있는 후에 시를 가로지르는 강. 가을이 되면 후에 상류의 난초에서 떨어진 꽃잎이 강으로 떨어져, 향수와 같은 방향을 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나?
▼ 투본강 투어[목선을 타고 투본강 호이안에 흐르는 투본강 관광 + 도자기 마을 관광] 이 흐응강 투어로 바뀐다. 어느 것이 좋은 지는 모두가 처음이어서 모른다마는 배 타는 것이 목적이 아닐바에야 볼거리가 있는 곳이 좋은데 아마도 흐응강보다는 투본강이 나았을 성 싶다. 배타고 가며 특별한 구경거리가 없다. 낚시하는 사람,물소 몇마리가 전부다.
▼ 우리가 탄 것이랑 같은 배. 내부에 살림살이들이 있는 공간이 있고 간단한 기념품들이 전시하고 팔고 있는데 누가 살까 싶은 수준의 물건들이다.
▼ 티엔무사원까지 버스 대신한 이동수단이었다.
티엔무사원[Chùa Thiên Mụ,天姥寺]
응우옌 왕조가 건설한 후에 성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흐응강 북안 언덕에 있다. 왕실연대기에 따르면, 후에의 호족이었던 응우옌 호앙은 인근 지역을 여행하다가 빨간색과 파란색 옷을 입고 그곳에 앉아서 뺨을 문지르고 있는 천모(天姥)로 알려진 노파로부터 그곳의 전설을 들었다. 그녀는 예언하기를 한 영주가 와서 그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언덕에 탑을 세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예언을 남긴 직후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듣고 호앙은 이곳에 절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이것이 천모[天姥寺]사가 세워진 배경이었다.
입구의 7층 석탑이 유명하고, 부페와 탄압에 항거한 틱꽝득스님의 소신공양 대한 기이드의 이야기가 길다.
▼ 티엔무사원 입구. 일주문이 있는 우리의 절과는 외관상의 차이가 있다.
▼ 티엔무 사원의 복연보탑(福緣寶塔). 1884년 세워진 8각 7층 석탑이고 높이가 21m이다. 탑의 각 단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탑의 좌우에는 범종과 탑비가 자리하고 있다.
▼ 대웅전.
▼ 틱꽝득 스님이 소신공양을 하려고 타고간 오스틴 자동차가 전시되고 있었다.
1963년 6월 11일 오전 10시, 베트남 사이공 중심가 도로 한복판에서 틱꽝득(釋廣德)스님이 당시 정권의 독재와 부패, 불교 탄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표시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수 성냥을 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불길 속에서 스님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합장한 채 육신을 불태웠다. 이 소신공양 사진은 전 세계에 공개돼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으며 베트남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소신공양을 마친 시신에서 심장만이 불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타지 않은 승려의 심장은 강인한 저항 정신과 자비의 상징으로 남아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동생이자 비밀경찰 총수였던 응오딘누의 부인 마남 누는 스님의 소신공양을 "중의 바비큐 파티"라 조롱해 세계인의 지탄을 받기도 했단다.
▼ 화염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스님과 타지 않은 심장의 사진도 있다.
▼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는 곳의 앞 공간에 잘 관리된 분재들이 전시되어 있다.
▼ 절의 맨 뒷쪽에 있는 틱동하우 스님(1896~1992)의 사리탑.
▼ 김여사 뿌리가 희한하게 생겼다고 부른다.
▼ 중국의 유비,관우,장비가 여기까지 왠 걸음을 했을꼬. 여긴 베트남 후에인데.
▼ 김여사 망고에 자꾸 눈이 간다. 결국은 호텔에 가서 먹자고 8개를 산다. 무게로 파는데 4개에 2,000원 꼴이다. 우리돈도 받는다.
카이딘황제릉[lăng Khải Định]
▼ 카이딘황제릉 오르는 계단. 가이드가 상하이 예원과 같은 맥락으로 이곳 용의 발톱 수(4개)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믿거나말거나다. 36개단을 오른다.
▼ 이딘 황제의 아들인 바오다이가
▼ 앞쪽 열은 신발을 신었고 뒷쪽열은 맨발이다. 문무의 차이인 듯 싶다.
▼ 카이딘의 왕릉 천정궁[天定宮]. 비에 젖어 더 검게 보이는 것인지, 낡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실제보다 더 오래된 고풍을 느끼게 한다. 한자만 없으면 서구의 어느 성 같은 분위기다.
▼ 청동에 금박을 입힌 1톤무게의 .
▼ 자기와 유리 파편으로 모자이크해 놓은 장식은 화려함의 극치다. 천정에는 구룡이 날고...
카이딘왕릉을 끝으로 다낭으로 돌아오려 버스에 오른다. 베트남 마지막 응우엔 왕조의 수도여서 전쟁통에 파괴된 유적들이 많다해도 그냥 그대로 볼거리가 수월찮을텐데, 수박 겉 핥기로 때우기식의 투어가 아쉽다. 자국 가이드가 안내를 해야한다면 소통이 가능하고 유적에 대한 설명을 할 정도의 말은 되어야지, 가는 길만 가르켜 주는 것은 길안내밖에 안된다. 그건 여행가이드가 아닌 듯 싶다. 이동 중에 설명을 듣는다해도 현지에서 듣는 것하고는 천양지차이니 여행사에서 이런 부분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는 건 나만의 생각인가.
후에황성만해도 태화전과 세조묘 두군데만 갔으니 10%는 구경했을려나? 민망왕릉은 이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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