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산우회 선후배들이 불광역에서 북한산 비봉으로 가서 하산은 승가사 또는 삼천사 진관사로 하는 산행 날이다.
북한산 구석구석을 누빈 동기 윤정식군과 조성순군의 부재로 대장 선배로 부터 리딩하라는 숙제를 받았다.
동행하기로 한 동기들과 후배 몇이 사정상 빠지게되어 소수 정예(?)가 예약되었다.
전철에서 국회 법률자문관으로 파견되어 있는 후배랑 만나서 수상한 시절의 얘기를 잠시 나누는 사이 금방 불광역 도착이다.
최고참 8년 선배와 13년 막내후배 그리고 그사이의 몇몇 기수 대원들과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산행은 사모바위에서 승가사로 하산하기로 한다. 응봉능선을 타면 산행의 맛이 더 좋기는 하지만 삼천사나 진관사로 내려가서는 식당이 여의치 않아서 하산 코스를 그쪽으로 잡는다. 어제 첫눈이 내려서 바위길이 미끄러울 수 있으니 모두들 안전한 산행이 되도록 당부를 하고 출발한다.
1. 누구가 : 대건청운산우회 동문들과
2. 언 제 : 2016년 11월 27일(일) 흐림.
3. 어디로 : 족두리봉,비봉,사모바위-구기탐방지원센터
4. 얼마나 : 5시간 25분(휴식,간식시간 포함)
▼ 이동경로 : 불광역-대호아파트 뒤-족두리봉-향로봉삼거리-관봉-비봉-사모바위-승가사-구기탐방지원센터-구기터널교차로
▼ 불광역 1번출구의 먹자골목 입구에서 선후배들과 인사 나눈다.
▼ 오늘의 산행코스는... 안산을 해주십사 하는 얘기를 한다. 09:15에 출발이다.
▼ 09:23 대호아파트 뒤 들머리.
▼ 09:30 둘레길과 교차점.
▼ 10:11 족두리봉.
▼ 족두리봉을 돌아 가는 길에 어제 내린 눈의 흔적.
▼ 족두리 아래로 바위를 즐기는 사람들.
▼ 11:06 향로봉 서편 산불감시초소.
▼ 11:32 향로봉삼거리. 오늘 산행코스에서 땀나는 구간은 끝이다.
▼ 11:42 관봉.
▼ 명당자리가 비어 있어 얼른 영역표시하느라 자리부터 깔았다. 30여분이 지나니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서둘러 빵을 빼준다.
▼ 12:30 비봉입구. 눈에 미끄러질까봐 오르지말자고 했는데...
▼ 비봉 올랐다 내려오는 아줌씨 땜에 몇이서 올라 본다. 항상 사람에 부대끼던 코뿔소바위가 모처럼 한가하다.
▼ 구경만 하다 포기한 코뿔소 등을 타는데 부탁한 그림이 좀 아쉽다.
▼ 12:57 사모바위.
▼ 13:03 사모바위에서 인증만 하고 바로 돌아서서 승가사로 하산길 잡는다.
▼ 13:23 승가사 입구.
▼ 해우소에 볼일 겸해서 절집구경 간 대원들을 기다리며...
▼ 13:56 구기삼거리.
▼ 14:14 구기탐방지원센터(구기분소).
▼ 14:40 구기터널교차로.
▼ 두부와 빈데떡+곡차
구기탐방지원센터에서 구기터널교차로로 걸어나오며 성명기대장 선배랑 여러 얘기를 나눈다.
젊어서 어려웠던 이야기 중에 위암으로 위를 반 절재하고도 매주 산을 타면서 살아남아 덤으로 사는 인생이랑 야그부터
2살 아들 백혈병, 둘째의 유산, 아내 폐결핵...고통 속에서도 축복이 있었다는 얘기에 가슴 잔하다.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오라는 요청에 몇날은 고민하다가 본인에게 주어진 재능은 이 기업을 경영하는 것 뿐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 판단을 옳았다는 생각을 한단다......
예전에 가 본 원조 할머니 두부집으로 안내해서 하산주 한 순배 돌린다.
오늘 이 코스의 일일 대장으로 리딩을 잘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에 숙스럽기도하고 묘하다.
전날 눈도 왔고, 만족스럽지 못한 날씨에 미끄러 지지나 않을까 걱정했는데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어 다행이다 싶고
서로를 배려해준 선,후배 모두가 고맙다.
우연히 2년전의 성명기 선배 이야기를 중소기업청 블러그에서 보게되어 옮겨 본다.
도전하는 열정에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다
_여의시스템 성명기 대표
우리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도전하지 않는 기업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전’은 쉽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와 현실적인 고통이 크나큰 장벽이기 때문이다. 여기 도전과 열정으로 대변되는 여의시스템 성명기 대표가 있다.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굴곡졌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한없이 좋았다가 끝없이 추락했다. 몇 번의 좌절이 있었지만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내일을 위한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다. 그의 이야기가 더욱 가치 있는 이유다.
미래를 준비하는 기업
1991년 문을 연 여의시스템은 산업용 컴퓨터를 비롯해 컴퓨터 보안장비 하드웨어, 산업용 네트워크 장비, 디지털 사이니지, 키오스크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왔다. 언뜻 보면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산업용 컴퓨터를 원천기술로 하고 있다.
“80~90%의 비슷한 기술을 적용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제품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것이지요. 이것을 일명 ‘캐논트리’ 전략이라고 합니다. 글로벌 기업인 일본의 캐논이 광학기술을 이용해 카메라는 물론 망원경, 잉크젯프린터, 3D 프린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위기를 이겨냈던 것에서 힌트를 얻은 거죠.”
여의시스템 역시 2008년 당시 글로벌 경기침체로 기존 사업군의 매출이 줄어들었지만, 다른 사업이 이를 보완하면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현재 국내 산업용 장비 시장에서 여의시스템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산업용 컴퓨터는 30%대의 점유율로 매년 시장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각기 다른 고객의 요구에 맞는 다품종 소량생산 시스템은 강점이다. 세계적인 스마트폰 제조기업에서 여의시스템의 자동제어 장비를 채택한 것도 이 때문. 유전 폭발과 혹한·고온 등의 극한상황을 견디는 ‘방폭컴퓨터’는 여의시스템의 노하우가 집약돼 있다. 그 기술력을 인정받아 2011년에는 중소기업 기술혁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그동안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또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PC에서 피처폰으로 이는 다시 스마트폰으로 주도권이 바뀐 것처럼 앞으로는 사물인터넷과 헬스케어가 주도할 것이라고 내다 본 것이다. 이를 위해 이미 올해 6월 헬스케어사업부를 만들었다.
“사물인터넷은 모든 사물에 해당하는 만큼 대기업에서 다량으로 생산하는 것보다는 중소기업이 커스터마이징한 제품을 소량으로 생산하는 편이 더 경쟁력이 높습니다. 귀, 눈, 목 등 환자가 제대로 볼 수 없는 곳을 블루투스 장비를 연결해 사물인터넷으로 만든다면 분명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호기심이 만들어낸 반전 인생
여의시스템과 성명기 대표이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유년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학교 1학년 시절,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수업시간에도 책상 아래에 라디오와 무전기 회로도를 펴놓고 몰래 공부하다 선생님께 지적받기 일쑤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학업성적은 ‘꼴찌’. 3차 추가모집으로 고등학교에 가까스로 입학했지만 그는 여전히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을 앞두고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당시 저는 엔지니어나 과학자처럼 공학도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현실적으로는 대학에 못 들어갈 성적이었어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딱 전파상 주인이 되겠다 싶었죠. 공학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애지중지하던 라디오 관련 서적과 부품들을 모조리 다락방에 옮겨놓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어요.”그렇게 1년, 그는 기적처럼 연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그의 호기심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성적은 들쑥날쑥. 심지어 대학 1학년 때는 F학점을 6개나 받았고 따라서 졸업학점이 부족한 상황에 몰렸다. 하지만 4년 만에 졸업은 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도전했고, 또다시 성공했다.
대학 졸업 이후,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기업에 취업했다. 주 업무는 외국 첨단장비를 들여와 배에 장착하고, 그 장비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본사에 텔렉스로 요청해 부품을 교환했다. 누구나 원하던 대기업이었지만, 그는 연구 개발을 하고 싶었다. 결국 한 달 만에 퇴사를 한 후 선배의 소개로 방위산업체 연구소에 입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하고 싶었던 연구 개발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동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누구보다 즐겁게 일하던 어느 날, 그 앞에 인생의 전환점이 될 반전 카드가 등장한다.
“미국 출장을 다녀온 동료가 애플 컴퓨터 트레이닝 키트를 사왔어요. 그때부터 연구원들이 틈틈이 용돈을 모아 부품을 구입해 3개월 만에 8비트 애플 컴퓨터를 만들었죠. 어느 날, 그 컴퓨터로 겔러그 게임을 하다가 불현듯 ‘컴퓨터를 조립해서 팔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 생각만으로 연구소를 나와 바로 창업을 했죠.”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이 일을 계획했던 사람처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때마침 컴퓨터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주문량이 쏟아졌다. 당시 그가 연구소에서 받았던 월급은 38 만원, 그는 창업한 지 세 달 후부터 한 달 만에 7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몇 달 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컴퓨터 열풍은 수그러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한 제어장비를 만드는 데 힘을 쏟기 시작한다. 때마침 대전 대덕연구단지 쪽에서 시험장비 개발 의뢰가 들어왔다. 자동차 시트 내구성 시험장비와 조향장치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모니터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제어장비 개발에 성공했고, 장비 한 대를 납품하면 천만 원이 남았다. 두 달에 한 대씩 팔았더니 10개월 만에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고통의 축복을 받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2살 난 아들인 석현이가 고열로 앓기 시작한 것이다. 청천벽력처럼 백혈병 진단이 내려졌다. 당시 백혈병은 지금과 달리 무척이나 무서운 병이었다. 치료과정에서 폐렴이 와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아들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채 차가운 병실에 누워있었다. 담당의사는 조심스럽게 5~10%의 생존율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반수면 상태에서도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니 동화책을 읽어주면 몸의 면역세포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작은 희망이었다. 그날부터 그의 아내는 하루에 5시간 이상 아이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줬다. 아내도 충격과 과로로 인해 유산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그는 가장으로서 2주일에 천만 원씩 들어가는 병원비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아파트를 팔고 시흥의 전셋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숨 좀 돌리나 싶었는데, 또다시 아내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 폐결핵이었다. 전염이 우려됐다. 더 큰 문제는 아이와 엄마를 격리해야 했다. 이때부터는 빚이 쌓여만 갔다. 아내의 치료를 위한 주사를 직접 놔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당시 둘째도 태어났다. 현실에 역경과 고난이 거듭될수록 그는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고 세상이 자신에게 준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아들과 아내의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다행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성명기 대표 자신이었다. 가족들 뒷바라지에 본인이 아픈 것도 잊고 살았던 것이다. 내시경 결과는 위암. 당시 33살이었던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모든 가족이 건강을 되찾으면서 다시금 가슴에 새로운 도전의 희망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원칙이 바로선 기업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성명기 대표는 모든 일에 있어 신뢰를 최우선에 둔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례가 있다. IMF 이후 환율이 두 배 이상 오르면서 당시 여의시스템은 6개월 동안 공장을 멈춰야 했다. 그때쯤 한 기업에서 서브모터 컨트롤 보드를 제작할 수 있는지 문의가 들어왔다. 빡빡한 일정과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마냥 놀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개발을 결정했다. 진행 도중 여러 요구가 빗발쳤고, 그렇게 납기일은 점점 다가왔다. 연구원들이 밤낮없이 일했지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거래처 대표를 찾아가 개발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거래처 대표는 여의시스템뿐만 아니라 본인 또한 망하게 생겼다며 한탄했다. 그렇지만 그는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사장님,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신 제가 그 제품을 일본에서 수입했습니다.”
성명기 대표는 집 담보대출로 자금을 마련해 개당 50만 원을 받기로 했던 제품을 100만 원에 수입했다. 결국,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큰 손해를 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신뢰는 철칙이다. 이 아름다운 약속은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때는 2003년. 국내 기업들이 중국 등으로 대거 공장을 옮기면서 여의시스템 또한 최악의 불경기였다.
“임원들이 30% 인력감축안을 가져왔더군요. 이미 회사 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악이었죠. 또 내 손으로 뽑은 직원들을 감축하려니, 죽음 못지않은 고통이었습니다. 끝내 결론을 내렸죠.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살자’고요.”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투명경영’과 ‘사업부·팀별 경쟁체제’ 도입이었다. 먼저 투명한 경영을 위해 회사의 경영 상태를 사원 모두에게 투명하게 공개했다. 회사 상황을 전부 공개했더니 직원들이 알아서 움직였다. 대신 회사 실적과 사원 인센티브를 연계해서 사원 개개인과 팀별 성과에 맞춘 철저한 차등 성과급 제도를 시행했다. 또한 수익이 늘어나면 모든 직원들에게 고루 분배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위기를 이겨낸 후 성명기 대표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 회사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나게 한 일등공신은 바로 직원들이었다는 점이다. 직원들의 역량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곧 회사의 발전이라는 생각으로 직원 교육에 투자했다. 원어민 강사를 초빙해 중국어, 영어를 가르치고 정부에서 지원하는 독서통신교육을 비롯해 여의포럼, 기술포럼, 직능교육 등 다양한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또한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별도의 학점제와 이수 기준 등을 만들어 마치 대학과 같이 관리하고 있다.
그는 교육 못지않게 ‘소통’ 또한 강조한다. 특히 각 부서 막내 사원들과 함께하는 ‘CEO와의 대화’ 시간은 늘 즐겁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제가 대표이다 보니 그 누구도 회사의 단점을 말하려고 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비판하는 사람에게 상품권을 준다’고 했더니 다양한 불만들이 쏟아지더군요. 하하.”
그는 사원들이 제안한 부분들을 가장 먼저 처리했다. 그 외에 5년마다 근속자에게는 해외 배낭여행의 기회를 주었다. 5년이면 동남아, 10년이면 유럽, 15년이면 남미다. 5~10명이 한 팀이 되어 티켓팅부터 스케줄까지 모두 알아서 해야 한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이처럼 여의시스템은 모든 프로그램은 하나하나의 교육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모든 것은 끈끈한 신뢰가 되어 CEO와 직원들을 잇는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도전을 꿈꾼다!
대학 시절, 고소공포증과 사람들 앞에 서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무턱대고 산악부에 들어갔다는 성명기 대표. 그는 두려움을 걷어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산악회 회장까지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리더십을 배웠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도전했다.
현재 이노비즈 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건강한 기업들의 단체이긴 하지만 기업 사이에 결속력이 약했던 이노비즈 협회를 탄탄한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동안 협회의 등산·골프모임은 물론 각종 교육과정을 활성화해 회원사 CEO들의 화합을 도모해왔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베트남 합작투자를 희망하는 국내 이노비즈 기업과 현지기업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여의시스템, 대경산업 등 국내 혁신기업 9개사가 ‘이노비즈 한·베트남 기술융합투자단’을 구성, 베트남을 다녀왔다.
여의시스템 대표, 이노비즈 협회장인 그는 현재 모교인 연세대학교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경험담을 인생 후배이면서 동시에 제자이기도 한 학생들에게 강의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은 그동안 겁쟁이였다, 다시 도전하겠다’는 제자의 메시지에 오히려 본인이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마음이 답답한 날이면 어김없이 암벽등반을 한다는 성명기 대표.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도전에 목마르다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다 보면 인생이 벽돌로 뒤통수를 때리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낙담하지 말라’고요. 저 또한 갖은 역경과 시련에도 쓰러지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오늘도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성명기 대표. 그는, 고로 존재한다.
[출처] [CEO에게 길을 묻다] 여의시스템 성명기 대표|작성자 중소기업청
'산오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 대신 운해의 덕유산 (0) | 2016.12.20 |
---|---|
인천 원적산 산책 (0) | 2016.12.11 |
보이지 않는 암수 마이산 (0) | 2016.11.22 |
북한산 비봉능선-응봉능선 (0) | 2016.11.15 |
삼성산 삼막사 가을 나들이 (0) | 2016.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