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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시대 왕성 공주 공산성

자어즐 2022. 6. 19. 22:02

웅진성 수문병 근무 교대식이 오후 4시에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열심히 왔는데 6월 둘째 주부터 8월 말까지 무더위로 일시 중단되었다는 소식에 조금은 아쉽다.

공주에서 백제유적지를 보면서 지금까지 백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미안한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나는 건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의자왕과 계백장군에다가 근초고왕과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파한 왕인선생, 아직기를 더한 정도다. 그리고 주몽 드라마에서 소서노와 그녀의 아들 비로, 온조가 기억난다. 

그래서 오늘 무령왕과 만남이 반갑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된 웅진기 백제 왕성인 공산성 성곽을 따라 걸으며 갱위강국의 백제를 느낄 수 있어 의미가 있다.

 

공주의 옛이름은 ‘고마나루’라고 하며, 한자로 웅진(熊津)이다. 웅진은 백제의 도읍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면서 새로운 도읍이 되었다. 웅진도읍기(475~538년) 63년간 백제의 왕성은 웅진성이며, 지금의 공산성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은 북쪽에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公山)의 산세를 활용하여 축조된 천연의 요새입니다.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있는데, 동쪽 구역의 토성 구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석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산성은 백제가 사비(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는 5방성 가운데 북방성이었고, 660년 7월에는 의자왕이 사비에서 공산성으로 피신해 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다 항복하기도 하였다.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천주의 치소로, 조선시대에는 충청감영과 중군영이 자리하는 등, 오랫동안 지방의 거점이자 방어성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였다고 공주시가 설명한다.

 

1. 누구가 : 신달, 영화, 월동, 재정, 종철, 철홍

2. 언    제 : 2022. 06. 18(토) 

3. 어디로 : 공주 공산성 성벽둘레길 

4. 얼마나 : 1시간 20분

 

공산성 앞 무령왕 동상. 매표소. 공산성 금서루

공산성주차장이 만차여서 돌아 나와 길 건너 공영주차장과 길가에 각각 주차하고 공산성 금서루 입구로 향한다. 공산성 앞 회전교차로에 작년 9월에 제막된 무령왕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9.5m 높이의 동상은 왕이 중국 양나라에 갱이강국 선포 국서를 보내는 모습이다. 좌대에 구동부가 설치되어 360도 회전하게 되어 있다. 친구들이 공산성을 돌고 나서도 방향이 그대로 라며 고정식 아니냐고 물음표를 하길래 무령왕이 무게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돌지 않고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점잖게 한 바퀴 굽어 살핀다고 해 둔다.

성인 기준 인당 1,200원의 입장료가 있는 매표소 입구에 무료입장의 안내가 붙었다. 왜 입장료를 안 받는냐고 물음에 관계자가 코로나 때문이라 답한다.

 

2015년 7월 공주의 공산성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비롯한 부여·익산의 백제유적 8곳이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중국과의 교류를 기초로 백제의 독창적인 문화를 이룩하고, 이를 일본 등 주변 국가에 전하여 고대 동아시아 문화 번영에 기여한 점이 높게 평가되어 세계인의 유산이 된 것이다. 특히 공주 공산성은 백제 웅진도읍기(475~538년)의 왕성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금서루 입구에는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군이 자리하고 있다.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공산성(公山城ㆍ사적 제12호)은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에 공산(公山)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흙으로 쌓은 포곡형(包谷形) 산성으로, 성곽의 총 길이는 2천660m다.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이다. 시작은 공산성 중에 가장 아름답다는 금서루에서 시작한다. 금서루는 좌우 성벽이 도약을 위해 양 날개를 위로 올린 역동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성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안내문의 설명이다.

 

성안으로 들어와 금서루를 보고 오른쪽 공산정 방향(동쪽)으로 성곽을 한 바퀴 돌아 볼 참이다. 금서루 좌우 성벽에 황색 바탕에 테두리에 흰색인 깃발이 바람에 날린다. 깃발에는 송산리 6호분 벽화 사신도 중에 서쪽의 백호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 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라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다.

 

강바람 맞으며 성벽 계단길 잠시 올라서면 지붕이 하늘을 닿은 공산전이 눈에 들어온다. 배를 연결하고 널빤지를 깐 배다리가 변신한 금강철교는 공주의 관문 역할을 오랫동안 했단다. 공산정에 올라 보니 주위 경관이 시원하게 전개. 

 

금강의 물줄기와 신시가지, 공북루와 성곽의 모습이 보이는 공산정.
공산성의 북문, 공산성 공북루

공산정에서 가파르게 내려가는 계단길 끝에는 보수 작업중인 공북루가 자리하고 있다. 공북루는 공산성에 설치된 문루 중 북문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선조 36년인 1603년에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시축 후 수 차례에 걸쳐 개수가 이루어진 건축물이다. 공북루 주위 성곽길에는 현무가 그려진 깃발이 나란히 한다. 공북루 앞 넓은 골짜기는 70여 동의 기와 건물지와 축대, 도로, 석축 연못 등 여러 가지 시설물이 확인된 왕궁관련유적지가 펼쳐져 있다. 

 

공산성 잠종냉장고. 공산성 만하루와 연지

공북루에서 만화루로 가기 위해 오르막을 다시 오르면 얼음 창고로도 불리는 잠종냉장고가 있다. 석빙고 같은 이것은 충남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 씨를 보급하기 위해 만든 지하 저장 시설이란다. 조선시대에는 한겨울 맑은 금강물이 꽁꽁 얼면 얼음을 깨서 왕겨에 싸은 뒤 여기에 저장해 뒀다가 여름에 꺼내 썼다고 한다. 
다시 내려가는 성곽 계단에서 아래로 보이는 풍경은 독특하다. 4면을 돌로 쌓았는데 두면에 층계를 만들고 내려가기 쉽게 만든 사각 우물 연지다. 앞은 금강이고 뒤는 연지라, 만화루에 앉아 시 한 수 읊으면 세상 근심 없을 것 같은 풍경이다. 영은사도 연지랑 거의 붙어 있다.

 

영은사

크지 않은 절집 영은사 오른편 건물 매점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인다. 영은사는 조선 세조 4년인 1458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처음에는 묘은사로 불렸다가 이괄의 난 때 이곳으로 인조가 피신을 하여 은적사로 하였다 현재는 영은사로 고쳐 부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단다. 조선시대 이전인 백제 때의 사찰이라는 추정도 있고 고려 때에 지어졌을 거라는 설도 존재한다. 

 

성벽은 롤라코스트를 탄다. 여기 꼭데기에는 서거정과 공주 10경의 게시판이 섰다.
명국삼장비

충남 유형문화재로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가을 공주에 주둔하면서 공주민을 왜(倭)로부터 보호해주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 명(明)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提督 李公),위관 임제(委官 林濟), 유격장 남방위(遊擊將 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송덕비(謝恩頌德碑)이다.본래는 공주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 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는데, 일제(日帝) 때 일인(日人)들이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宣祖) 37년(16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몀국삼장비 옆에 있는 공산성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公山城 臨流閣)은 백제 24대 동성왕 재위 22년에 왕국의 동쪽에 지어진 누각이다. 공산성 정상부에 위치하며 주변은 편평한 대지로 다듬어져 있다. 높이는 15m, 2층구조로 이루어진 누각으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로 추정된다. 1980년 공산성을 발굴하면서 임류각 터를 알게 되었고 1993년 복원하였다.

 

공산성 광복루

광복루는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는 누각이다. 이곳은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토성이 겹성으로 위치한 곳인데 공산성 두 개의 봉우리 중 서쪽의 봉우리에는 쌍수정이 있고 동쪽의 봉우리에는 광복루가 있으며 공산성의 가장 고지대에 위치하여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원래 조선시대 중군영의 정문 문루였고, 명칭도 폐문루(閉門樓)였다가 일제 초기 중군영이 폐쇄됨에 따라 문루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고, 이때 명칭이 웅심각(雄心閣)으로 바뀌었다. 광복루라는 명칭은 1946년 4월에 이곳을 방문한 김구, 이시영이 광복을 기념해서 붙여준 이름이란다.

 

터치 스크린형 디스플레이 안내판
테두리가 푸른 색인 청룡 깃발의 보호 아래 잇는 공산성 영동루

영동루로 내려가기전 동쪽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공주시가지에서 충청감영터, 대통사지, 우금치 전적지를 찾아본다. 영동루는 이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그 자료와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 2층 누각으로 복원하였다. 명칭은 시민들의 공모로 정했단다. 

 

공산성 진남루

영동루에서 4분여 떨어져 있는 공산성 진남루(公山城鎭南樓)는 조선 시대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1948년에 붕괴된 것을 공주읍장과 읍민들이 새로이 중건하였는데 이것을 1971년 전면적으로 해체 보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다. 백제의 흔적을 찾기보다는 조선의 문루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이라 아쉬운 부분이 있다. 깃발은 테두리가 붉은 주작이다.

 

공산성 왕궁지와 쌍수정

쌍수정(雙樹亭)은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공산성에서 피난하고 있을 때 두 나무에 기대어 멀리 북쪽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두 그루의 나무에 정 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었다. 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이다. 인조가 쉬었던 두 그루의 나무가 죽어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자 관찰사 이수항(李壽沆) 부임하여 삼가정(三架亭)을 세웠는데 이것이 쌍수정이다. 오늘날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단다.

 

다시 금서루.

금서루를 출발해서 성안을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성벽길을 돌아 원점으로 복귀하는데 1시간 10분이 소요되었다. 실질적으로 정문 역활을 하는 이 금서루도 내용연수는 30년 정도밖에 안된다. 성안으로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도 없던 것을 1993년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비. 백제무령왕릉연문[百濟武寧王陵埏門. 백제 무렬왕릉(묘지) 가는 문]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는 공주의 공산성,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나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익산의 왕궁리유적, 미륵사지로 구성된다.

 

오늘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무령왕릉과 왕릉원 - 국립공주박물관 - 공산성 투어를 기분 좋게 하고 숙소로 정해놓은 공주 정안면 월산리 소재 소랭이개울가 펜션으로 향한다. 정안농협 하나로마트에서 필요항 일용할 양식을 구입한다. 밤막걸리를 포함한 주님과 삼겹살, 과일류, 김, 라면, 간식 등을 바구니에 담는다.

 

소랭이개울가 펜션

밤 막걸리가 달짝지근하다. 오늘 주메뉴는 홍이가 수고로 완도에서 올라온 민물장어다. 굽는 쉐퍼도 홍이가 전담으로 수고한다. 노릇노릇 굽힌 장어에 삼겹살이 천대 받는다. 동이의 밭에서 수확해온 상추, 고추, 오이 등 채소류도 맛을 더하고 친구들의 입담도 잘 굽힌 장어만큼 구수하고 저녁시간은 길다. 그런데 3명이나 빠진 자리가 헐빈한 게 아쉽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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