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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삼랑성·전등사 그리고 차 한잔.

자어즐 2023. 1. 23. 23:44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 아니고 어제였다. 올 해도 김여사랑 엄니께 전화로 세배를 드리고 둘이서 단촐하게 차례를 모신다. 늙은 엄니도 허리가 불편해서 괜히 무리하면 덧날까봐 둘이서 정성껏 차례를 지내라고 하고, 구정과는 무관한 곳에 있는 아들네는 길이 멀다. 예전에 아랫 지방으로 내려갈 때는 작은 집도 모여서 분위기가 났지만 지금은 달랑 둘이라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차례를 지내고 모처럼 극장구경이나 갈려니 '아바타' '영웅' '교섭' 김여사가 좋아하는 주제가 아니여서 공원을 산책하는 걸로 설을 보낸다. 명절은 가족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어야하는데.

오늘은 이동하면 길거리에 시간을 다 보내야 해서 아랫 지방으로 갈 엄두를 못내고 전등사가 있는 삼랑산성을 한 바퀴 돌고 오기로 한다. 대곶IC에서 고속도로를 나오는데 통행료가 무료다. 초지대교와 가까워질수록 차가 정지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설날이다 보니 세뱃돈의 3·5·10 이란 잠정적인 법칙 즉 초등학생까지는 3만원, 중학생 5만원, 고등학생 이상은 10만원이라는 것이다. 여론 조사에서 적정한 세뱃돈이 5만원이라고 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5만원권 지폐의 발행이 세뱃돈 단가를 높였다고 얘기가 된다. 아이들에게 만원만 주기는 부족하고 좀스럽게 세어주기는 뭐해서 5만원을 주고 돌아서서 후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3만원권 지폐를 만들자는 의견이 있다. 현실적으로는 화폐 발행이나 현금취급기기 교체 등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효용성을 재고하면 쉬운 것이 아니다. 

 

주차에 2,000원이 필요하고 입장료는 어른이 인당 4,000원이다. 입장료 면제 대상에 경로우대가 65세가 아니고 만 70세 이상으로 돼있다. 전등사로 들어가는 문은 동문과 남문이고 우리는 문루가 있는 남문 종해루(宗海樓)로 들어간다. 성문을 들자말자 오른쪽 성곽길로 오른다.

 

이 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삼랑성(三郎城)이라 하고, 정족산에 있어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단다. 성내에는 유서깊은 전등사가 있고, 고려 고종 46년(1259) 이 성내에 궁궐을 지었으며, 조선 현종 원년(1660)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했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는 양헌수 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격멸한 전승지이다. 동문으로 들어 오면 성내에는 양헌수 장군의 전승비를 볼 수 있다.

 

동문 위를 지나서 성곽길을 오르면 좌측으로 온수리 방향 속세의 풍경이 펼쳐진다. 성냥곽 같은 성공회 온수 한옥성당을 찾아보고 반대쪽으로 길정저수지와 진강산이 보인다.

 

삼랑성 정상

내일부터 올들어 최저의 기온으로 추워진다는 예보가되어 있는데 오늘은 춥질 않아 봉우리를 오르노라니 덩어리에 열이 난다.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정족산[鼎足山]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골짜기(谷)를 포함하여 축조되었다.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서문

이곳을 다녀간 지가 6,7년이 되었으나 꽤나 지났다. 당시 서문은 열렸었는데...  서문에서 남봉을 오르면 전등사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볼 수 있다만 오늘은 여기서 절집으로 방향을 턴다.

 

전등사, 강화 정족산성진지

강화 정족산성진지(江華 鼎足山城陣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사고(鼎足山 史庫)를 보호할 목적으로 설치한 군사 주둔지 정족진(鼎足鎭)이 있던 곳이다. 1907년 방화로 소실되었으나 2009년 발굴 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해 대규모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월송요와 종무소 사이로 전등사 절집으로 들어 선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 창건 당시 진종사(眞宗寺)로 불린 전등사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 공주가 옥으로 만든 등잔을 시주하여, 부처님 말씀 즉 법의 등불을 전해왔다는 의미로 전등사(傳燈寺)가 되었다.

 

전등사 철종

보물 제 393호 철종은 중국 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회주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 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다. 수명 다한 고목에 달마대사 닮은 부처의 전등사를 찾은 객들을 살핀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을 얘기하자면 왕비를 시기질투한 몽골 출신 제국대장공주를 벌주려고 옷을 벗겨 나부상을 4개의 처마상에 조각했다는 설과 도편수가 대웅보전을 만들면서 사랑했던 사찰 앞 주모가 돈만 가지고 달아나자 그에 대한 복수로 사찰 앞 주모의 옷을 벗긴 나부상을 조각해 대웅보전 처마끝을 시지푸스처럼 영원히 들게 하는 벌을 내렸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대웅보전이 중건된 것을 볼 때 후자의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원숭이 모양을 닮기도 했는데 자세히 보면 중년 여인을 조각한 나부상 같기도 하다. 나부상이 모두 두 손으로 처마끝을 받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왼손만으로, 다른 한쪽은 오른손만으로 들고 있는 해학이 보인다.

 

대웅보전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보물 제1785호)과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 묘법연화경목판 104매(보물 제1908호), 삼존불 좌우에 염라대왕이 생에 업을 비추어 보는 업경대(인천 유형문화재 제47호), 불상을 모셔 놓은 3단으로 된 단인 수미단(인천 유형문화재 제48호),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인천 문화재자료 제21호)가 보관되어 있다.

 

전등사에서 빚은 안심 먹거리 강화 섬 쌀로 만든 떡국거리 한 봉지에 만원짜리 하나 사서 맛보니 쫄깃한 게 맛이 있다. 관음전과, 보물 179호로 지정된 약사전이 보인다.

 

서해 조수를 만난다는 의미의 대조루

사찰에는 대표적인 문 세 개, 즉 사찰의 삼문이라 부르는 일주문과 천왕문, 불이문(해탈문)이 있다.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금강문을 두기도 하는데 전등사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일주문과 천왕문을 세우지 않았다. 삼랑성 안에 있어 성문이 이를 대체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남문과 동문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계단 위로 2층으로 된 대조루가 있다. 전등사의 출입문 역할을 하는 누각이고, 불이문을 대신한다.

1282년 정화궁주가 전등사에 대장경과 옥등을 시주하고 100여 년 뒤, 1389년부터 1391년 사이에 목은 이색(李穡)은 강화도 일대를 여행면서 대조루에 올라 지은 시에  전등사로 불리게 되는 정화공주가 언급된다.

蠟屐游山興自淸(납극유산흥자청) 나막신 신고 산에 오르니 흥취 절로 맑고

傳燈老釋道吾行(전등노석도오행) 전등사 노승이 나의 행차 인도하네 

窓間遠岫際天列(창간원수제천렬) 창밖의 먼 산들은 하늘가에 벌여있고

樓下長風吹浪生(누하장풍취랑생) 누각 아래 긴 바람 물결치고 일어나네

星歷蒼茫伍太史(성력창망오태사) 세월 속의 역사는 오태사가 까마득한데

雲煙慘淡三郞城(운연참담삼랑성) 구름과 연기는 삼랑성에 참담하구나

貞和願幢誰更植(정화원당수경식) 정화궁주의 원을 세운 당간을 뉘라서 고쳐 세울 건가

壁記塵昏傷客情(벽기진혼상객정) 벽에 걸어놓은 글에 쌓인 먼지가 내 마음 상하게 하네
오태사는 고려 충신 오윤부(伍允孚)로 복속된 원의 공주에게 항거한 유일한 인물이다.


무설전및 서운갤러리, 죽림다원

무설전은 기존 가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지하에 현대식 공간으로 조성한 이색적 법당이자 복합 문화공간이다. 서운 갤러리는 무설전의 입구 부분에 불교와 미술의 만남 즉 종교와 예술의 공존하는 공간이다.

무설전 아래 경내 전통차 전문집 죽립다원을 찾는다. 방문객들이 자리에 틈이 없이 빼곡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실내 분위기가 아늑하고 멋이 있다. 김여사가 좋아할만한 소품들이 조화롭게 분배되어 있고 연꽃이 그려진 천으로 장식한 천정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 단청이 이색적이다.

 

죽림다원 수제차 쌍화차가 한약재를 오래 우려 낸 깊은 맛이 난다. 분위기가 더해서 다른 곳의 것보다 진하기가 다르다는 김여사 대웅보전 앞에서 산 떡국용 떡에도 자꾸 손이 간다.

 

차량이 귀성길만 밀리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전등사에서 초지대교를 넘어가는 데만 1시간이 넘게 소요된다. 도로 중간에 뻥튀기 장사를 하는 양반만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도로는 주차장인데 농로를 따라 달려오는 차들은 초지교차로 앞에서 끼어들기를 하는 데 왜 그리 얄밉던지. 달리 보면, 다른 이들이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힘인 걸 괜히 심술이 나 못끼어들 게 공간을 주지 않는 내가 지나서는 못나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