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산악회에서 화천 삼일계곡으로 가서 간단히(1시간 30분) 걷고는 물놀이와 보양식을 즐긴다는데,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만 것은 공식적인 술자리가 될 터여서 김여사 왜 그리 많이 마시냐는 둥... 쏟아지는 잔소리를 원천봉쇄하기 위함이다. 일기예보가 수상한 것도 한몫하고. 근데 요즘 일기예보가 영 신통치가 못하다. 얼마전 장마라서 며칠 비온다고 해 놓고는 하루도 안 오는 것을 보면 비싼 슈퍼컴퓨터가 확률이 낮은 쪽으로 맞도록 계산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이번에도 틀리면 일찍 춘천쪽으로 가서 용화산이나 가자고 해 두었는데 토요일 비 오는 모양새가 이번에는 맞출 태세여서 걍화 별립산행으로 급 수정한다. 이쪽은 오전 9시경부터 비가 그치는 것으로 예보되어 있다. 모처럼에 둘만의 강화행!
1. 누구가 : 김여사랑 둘이서
2. 언 제 : 2016년 07월 17일(일요일). 비와 구름.
3. 어디로 : 정족산[삼랑산성],전등사
4. 얼마나 : 동문주차장 원점복귀 1시간 50분
산의 생김새가 마치 세 발 달린 가마솥과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정족산[鼎足山]은 5개의 산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포곡식[골짜기(谷)를 포함하여 축조한 것]으로 축조되었다. 둘레는 2.3㎞ 정도로, 성곽은 산정상부에서 남문쪽 해발 75m 정도의 능선까지 내려와 있다. 산의 지형을 따라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북쪽과 남쪽의 고도 차이가 큰 편이다.
이 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 곧 삼랑(三郞)이 쌓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처음 쌓은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등이 각각 제시되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성벽은 막돌로 쌓았는데, 성곽에는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대문과 함께 복원된 남문이 있고, 4곳의 치(雉)도 확인된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동문은 막돌로 문 기둥을 쌓고 그 위에 벽돌로 아치를 올린 모습이며, 서문도 아치식으로 되어 있다
▼ 이동경로 : 동문주차장-동문(양현수승전비)-북문-삼랑산성정상-서문-남문[종해루]-전등사-동문-동문주차장
▼ 현재시간 7시 34분. 창밖에 계양산은 구름 속에 헤메고 있어도 베낭 하나에 물통하고 간식거리 준비해서 초지대교를 건넌다.
▼ 09:21 별립산들머리 서해유스호스텔 에 도착. 오른 편에 별립산은 구름에 더 깊이 묻혀있고 가량비에 발목 잡혀 차를 돌린다. 첫 방문에 비도오고 사람도 없고 안 올라 갔으면 좋겠다는 김여사 멘트에 꽁지 내린다. 그리하여 전등사로 슝~
▼ 돌려 나오는 길가에 빗물 메단 야생화.
▼10:35 동문매표소 동문주차장에 주차하는데 2,000원이 필요하고 매표소에는 한사람에 3,000원을 내라 한다. 주차장에서 약500m.
▼ 삼랑성[정족산성]
▼ 동문. 삼랑성(정족산성)에는 본래 동서남북 네 군데에 출입문이 있었다. 그 중 지금까지 이용되는 것은 동문과 남문이며 전등사 사거리에서 전등사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문이다. 전등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다. 그 대신 호국의 상징이었던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일주문 구실을 하고 있다.
1866년 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천주교 금령을 내리고 프랑스인 신부와 천주교 신자 6천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를 병인박해(丙寅迫害) 또는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 한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나머지 3명 중 리델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박해 사실을 전하면서 보복을 촉구했다. 로즈의 제1차 조선원정은 강화해협에서 한양까지의 수로를 탐색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이었다. 로즈는 3척의 군함을 이끌고 9월 18일부터 10월 1일까지 한강의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와 세밀한 지형 정찰과 수로 탐사를 하고 지도 3장을 만들어 돌아갔다. 로즈는 10월 5일 한강 봉쇄를 선언하고, 10월 11일에 본격적인 원정길에 올랐다. 군함 7척에 함포 10문, 총병력 1천여 명, 향도 및 수로 안내인으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을 대동하고 강화도를 공격했다. 프랑스군은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했다.
조선 조정은 강화도가 점령당하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고 대장에 이경하(李景夏), 중군에 이용희(李容熙),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했다. 그때 양헌수는 제주목사로 발령받았다가 천총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치고 강화도 수복작전을 구상했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했다. 우리군은 프랑스군의 신식 화력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양헌수는 프랑스군에 화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알고 기병(奇兵) 작전을 계획한다. 양헌수는 군사 549명을 이끌고 한밤중에 몰래 강화해협을 건너 11월 7일 정족산성(鼎足山城)에 들어갔다. 남문에는 초관(硝官) 김기명(金沂明)이 지휘하는 포수 161명, 동문에는 초관 이렴(李濂)이 지휘하는 경군(京軍) 및 향군(鄕軍) 157명을 배치, 매복시켰다.
이러한 조선군의 동향을 보고받은 로즈는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했다. 이 명에 따라 올리비에는 11월 9일 16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족산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자 남문과 동문을 지키던 조선군은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게 일제히 총격을 가함으로써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 포함 6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조선군 피해는 전사 1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이것이 병인양요의 전말이다. 이 전투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격퇴한 전투로 기록된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철수할 때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해갔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것,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다는 것,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 10:39 동문 안쪽 자리하고 있는 양헌수승전비.
▼ 10:39 남문 반대방향인 달맞이길로 정족산성 돌기 시작.
▼ 달맞이고개
▼ 진강산,길정저수지.
▼ 10:55 온수리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암문 같은 북문을 지나서 잠시면...
▼ 11:01삼랑성 정상[정족산].
▼ 별다른 표지는 없고 이정목이 삼랑성 정상임을 알린다.
▼ 정상에는 주위가 뚫려서 마니산,초피산,진강산.... 세어도,동검도... 석모도 쪽도 보일 성 싶은데 모두 어데로 갔나.
▼ 둘이서 이렇게 셀카 찍어본 기억이 없으니 치매가 아니면 처음이 아닌가 한다.
▼ 산성길 정리 작업의 희생양인 듯.
▼ 치(雉)
▼ 11:15 서문
▼ 뒤로 지나온 삼랑성 정상
▼ 11:22 남봉. 여기도 정상 마냥 주위가 뚫려 있고 공간도 재법 넉넉하다.
▼ 남봉에서 보는 전등사.
▼ 산성길 도는 동안 겨우 만난 객에게 부탁한 그림.
▼ 초지대교.
▼ 세어도
▼ 보호수 : 왕소사나무, 수령157년, 지정일 2001.08.06
▼ 11:44 남문. 네개의 문 중에 문루(門樓)가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며 ‘종해루’라 부른다.
▼ 전등사에는 두 그루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전설은....
▼ 전등사 윤장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단다.
▼죽림다원은 본래 전등사에 구성되었던 승병의 초소가 있던 자리였다. 이곳 승병들은 죽림다원에 본진을 두고 전등사 및 삼랑성 일대를 지켰다. 지금은 관람객들의 휴식처 겸 다원(茶園)으로 운영된다.
▼ 언위심성[言爲心聲, 말은 마음의 소리다]
말은 마음의 소리요 行事(行動)는 마음의 자취이다. 남의 말을 좋게하면 德이되어 그를 잘되게하고 남은 德이 밀려서 점점 큰 福이 되어 내몸에 이르고, 남의 말을 나쁘게 하면 害가되어 그를 망치게하고 남은 害가 밀려서 점점 큰 災殃이 되어 내몸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외부로 들어나는 것이 언행이다. 그 중 말은 파장으로 퍼져나가 원망의 대상을 찾아 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원망(축원)의 대상이 사라지면 남은 파장의 살기(생기)는 발원지로 되돌아 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는 말씀. |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이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다.
▼ 11:56 전등사에 들다.
▼ 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바리(鉢)형태를 띠고 있고, 구연부에는 덧띠를 두르고 있으며 약간의 균열과 파손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수리하여 양호한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수조(水槽)는 삼국시대부터 큰 돌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쓰기 시작하였으며 우물가에 두고 그릇 등을 씻을 때 사용하였다. 수조(水槽)는 궁궐에서는 드무라 부르는데 솥같이 생긴 그 안에 물을 채워 화재가 날 경우 바로 사용할 수 있고, 공중에 떠다니는 화마(火魔)나 불귀신이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벌써 동료가 와 있게 하여 다른 곳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설치한다는 설화가 있다. 현재까지 명문(銘文)이나 청동수조 제작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제작 연대를 밝힐 수 없지만 고려 말 내지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정족사고 가는 길.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을 얘기하자면 왕비를 시기질투한 몽골 출신 제국대장공주를 벌주려고 옷을 벗겨 나부상을 4개의 처마상에 조각했다는 설과 도편수가 대웅보전을 만들면서 사랑했던 사찰 앞 주모가 돈만 가지고 달아나자 그에 대한 복수로 사찰 앞 주모의 옷을 벗긴 나부상을 조각해 대웅보전 처마끝을 시지푸스처럼 영원히 들게 하는 벌을 내렸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 대웅보전이 중건된 것을 볼 때 후자의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원숭이 모양을 닮기도 했는데 자세히 보면 중년 여인을 조각한 나부상 같기도 하다. 나부상이 모두 두 손으로 처마끝을 받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쪽은 왼손만으로, 다른 한쪽은 오른손만으로 들고 있는 해학이 보인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 12:07 다시동문 앞. 좌측 달맞이길로 산성길 올라서 남문까지 한시간 남짓 산책하고 전등사 돌아보는데 거의 삼십분 보낸다.
뭘 먹어러 가실까나.
초지대교를 넘기 전에 우로 틀어 조금 가면 장어집이 있고 대교를 넘어서자마자 대명항 쪽으로 복어집도 손님이 많고 조금 더 진행하다 좌틀하면 게장 맛나게 하는 집이 있다. 그리고 인근에 생선구이집도 있고 두부집은 좀더 가야 있으니 골라 잡으시라.하니 돌솥밥에 생선구이가 낙찰이다. 깨끗이 비우고 나서 우리 김여사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야채가 없고 너무 생선에 치우쳐서 영향섭취의 불균형이라고 한마디 한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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